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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1. 명주

1. 명주

옷이란 보호(保護), 체온(體溫), 활동성(活動性)의 3대(大) 기능(機能)과는 달리 권위의 상징으로서 가장 많은 기능을 지녀왔으며 그 때문에도 옷이 발달하고 또 직물의 기술도 발달했던 것이다.

이 권위를 상징하는 직물로서 발달한 직물이 비단(絹)이었다.

비단의 발생지인 중국에 있어 양잠의 역사를 보면 유사(有史)이전까지 소급된다. 근년에 중국의 이제박사(李濟博士)가 산서성하현성북(山西省夏縣城北) 14Km지점에서 서기전 2천 년 전후의 유적에서 인공적으로 자란 누에고치 하나를 발견했다. 은대(殷代)에 이르면 갑골문자(甲骨文字) 가운데 뽕나무(桑) 실(絲)자가 보이고 은(殷)나라 유적에서 비단이 발견되고 있다. 주대(周代)에 이르면 《시경(詩經)》에 당시의 양잠과 견직물에 대한 노래가 많이 있으며 《서경(書經)》에는 한국과 가까운 산동성(山東省) 산서성(山西省) 등지에서 양잠(養蠶)과 견직이 성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이 처음 비단을 본 것은 기록상, 서기전 4세기 알렉산더대왕 원정때였다. 곧 서기전 327년 알렉산더대왕의 부장 네알코스가 인더스 강을 건너 펀잡지방에 침입했을 때 가볍고 부드러운 견직물을 보고 ‘인도의 산물로 나무껍질의 줄기로 짠 것 같다’고 말해놓고 있다. 이것은 인도에 수출된 중국의 비단임이 분명하다.

한국에는 언제부터 잠업과 명주(絹)가 있게 되었는가는 기록상 분명치 않으나 중국 문헌인 《삼국지위서(三國志魏書)》《삼국지예전(三國志濊傳)》《후한서동이전(後漢書東夷傳)》등에 이미 삼한 시대(三韓時代)부터 뽕을 치고 누에를 길러 옷을 짜 입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유사(有史)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각종 명주가 쏟아져 나왔고 그 직물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음을 엿볼 수 있다. 곧 이 고도로 발달시킨 요인은 임금이나 상류계급의 권위의 상징을 옷으로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인 것이다.

첫째 금(錦)이라는 명주는 신라의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479~499) 때에 이미 민수용(民需用)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곧 금(錦)은 이 시대 이전에 귀족이나 임금의 전용물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비단 가운데 가장 귀하고 고운 이 금(錦)은 빛깔이 다양하고 무늬가 정교하다. 색색가지 물감을 들인 색실로 여러 가지 무늬를 짜넣은 두터운 비단인 것이다.

고구려 고관들 모임에 입는 옷들은 모두 금수(錦繡)로 꾸며졌으며[위지(魏志), 고구려전(高句麗傳)] 백제왕은 파란 금(錦)으로 짠 바지를 입었다고 했다. [구당서백제전(舊唐書百濟傳)]

이 금(錦)은 신라 중엽부터 보다 아름답게 발달하여 선덕여왕(善德女王)은 그의 친당외교(親唐外交)이 선물로 태평송금(太平頌錦)에 수놓아 보낸일이 있고, 경문왕(景文王) 때는 아침안개(朝露) 무늬의 금대화어아(錦大花魚牙) 무늬 소화어아(小花魚牙) 무의의 금(錦)을 황실에 보냈던 것이다.

둘째, 고대 한국인이 입었던 명주(絹)로 나(羅)를 들 수 있다. 나(羅)는 가볍고 얇은 박견(薄絹)으로 짜임새가 성긴, 고급 명주였던 것 같다. 신라에서는 귀인들이 앞다투어 나(羅)로 옷을 해 입었기로 너무 사치스럽다하여 나라에서 입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내렸을 정도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것으로 관모(冠帽)를 꾸며 썼는데 자라(紫羅), 백라(白羅), 청라(靑羅) 등 색색가지 물을 들여 호사(豪奢)를 다했던 것이다.

셋째, 고대(古代) 한국인이 입었던 명주로 능(綾)은 능(凌)과 같다 했고 능(凌)은 곧 이름이니 얼음처럼 투명한 무늬를 부각시킨 명주인 것 같다.

넷째, 명주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견(絹)이 다른 명주와 다른 점은 나(羅)가 박견(薄絹)인데 비해 보다 두텁고 거친 후견(厚絹)을 견(絹)이라 불렀던 것 같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무늬를 천에다 부직(浮織)한 능(綾), 상복(喪服)으로 많이 쓰였다던 거친 명주인(인), 들누에(野蠶)로 만든 산주(山紬), 경명주 실을 꼬아 짠 겸(겸) 등 고대 한국인이 입었던 명주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어려운 누에치기

누에고치 속에 잠든 번데기가 열흘쯤 되면 나방이 되어 고치를 뚫고 나온다. 이 나방들은 이미 사랑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 짝을 찾아 헤맨다. 나방들이 짝을 찾으면 포옹을 한다. 보통 반나절 아니면 하루쯤 사랑한다. 이 기나긴 사랑을 하는 동안 수컷은 제각기 죽어간다. 모든 에너지와 영양분을 암컷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랑이 끝나면 수컷은 죽어버린다.

수컷이 죽은 바로 그 옆에서 누에고치의 나방은 알을 깐다. 사람은 그 알을 받기 위해 베나 종이를 깔아준다. 한 마리가 대충 2백 여개씩의 알을 낳는데 어찌나 질서 정연한지 알이 겹치거나 그 열이 흩어지는 법은 없다.

이같이 알을 받아 놓고 겨울을 지낸 다음 잠욕(蠶浴)이라 하여 이 알에 목욕을 시킨다. 소금에서 흘러나온 간수나 석회(石灰)를 탄 물에다 이 알을 12일간 간하여 잘 말린 다음 이듬해 청명(淸明)날까지 보관한다. 석회(石灰)나 간수를 구하기 힘든 지방에서는 누에 알을 옥상에 고정해 놓고 열이틀 동안 비바람을 쐰다. 이를 천로욕(天露浴)이라 한다.

이같이 잠욕(蠶浴)을 하는 뜻은 건강하지 못한 알을 죽이고 건강한 알을 보다 억세게 훈련시킴으로써 약한 누에로 하여금 뽕을 낭비하게 하는 폐단을 없애고 누에를 강하게 함으로써 보다 튼튼하고 질이 좋으며 분량도 큰 고치를 만들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보관하는 데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직사광선을 피해야 하고 기름냄새나 기름 연기, 탄류의 화기를 피해야 한다. 잠실(蠶室) 옆에서 방아를 찧어도 안 되고 곡성(哭聲)을 내도 안 된다. 산모가 잠실에 드나들어서는 안 되고 시어머니한테 꾸지람 들은 며느리의 잠실나들이도 금기(禁忌)다.

청명이 지나 사흘이 되어 알을 까기 시작하면 잠실(蠶室)을 만들어야 한다. 옛부터 잠실은 동남향(東南向)이어야 한다.

갓 부화된 어린 누에에게 먹이는 뽕은 반드시 보릿짚을 밑에 깔고 썰어야 하면 썬 후 단지 속에 넣어둠으로써 빛이나 바람을 피해야 한다. 뽕잎의 크기나 습기, 신선도, 분량, 그리고 누에 똥 등의 청결, 누에잠의 처리 들에 의해 고치실의 질(質)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곤잠(大眼)을 자고난 누에에겐 뽕을 썰지 않고 주는데 맑은 날 딴 뽕을 적셔주면 실에서 광택이 나므로 가장 이상적이다. 비맞은 뽕은 바람에 말려줘야 한다. 비맞은 뽕을 불에 말리거나 방바닥에 말려 먹인 누에고치의 실은 잘 끊어진다고 한다.

먹는 쌀 한 톨, 몸에 걸치는 실 한오라기가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고 그 한 톨의 쌀알과 한 가닥 실오라기에 드린 정성과 노력과 인내가 이것들을 이토록 신성하게 승화시켰던 것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옛 선조들이 실오라기 하나에 쏟는 집념이란 요즈음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만한 것이었다.

여느 비단은 가잠으로 만드는데 비해 천잠베는 산잠 또는 야잠이라 불리우는 야생 누에로부터 실을 베어 짠다. 혹은 천잠(天蠶) 이라고도 부르고 작잠(作蠶)이라고도 부른다. 이 천잠베는 그 희소가치 때문에 가잠(家蠶) 베보다 진중하게 여겼으며 중국에서는 황금계(黃金系) 또는 황금포(黃金布)로까지 불리었던 것이다. 이 천잠으로 짠 베의 특색은 광택이 간한 불염성의 섬유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천잠사(天蠶絲)는 염색이 되지 않는다. 최상의 천잠사는 가잠사(家蠶絲)값의 3~7배나 되었다고 한다. 천잠사의 둘째 특색은 여느 생사에 비해 굉장히 질긴 섬유라는 점이다. 천잠포는 가볍고 여느 비단보다 부드러우며 주름이 잡히는 법이 없다. 거기에 보온성도 강하여 목도리로서는 그보다 좋은 옷감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한국의 야잠은 가죽나무와 쓴너삼나무(苦蔘)에 누에를 기생시켜 그 나뭇잎을 먹여 기르는데 그 누에고치는 대체로 가잠보다 커서 큰 놈은 달걀만 했다 한다. 나뭇잎의 맛이 쓴 것이면 대체로 야잠이 되며 보다 쓴맛이 나는 나무에서 자란 누에고치일수록 질이 좋다 했다.


뽕나무

뽕나무는 태양(太陽)의 나무요, 남성을 상징하는 나무인 것이다. 그러기에 뽕나무밭에 심는 작물은 콩이나 수수같은 양성 작물은 심어서는 안 되고, 팥이나 녹두 같은 음성 작물을 심어야 작물도 잘 되고 또 그 작물이 뽕나무에 이익을 주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잠신(蠶神)을 모시는 습속

나라에서는 선잠단(先蠶壇)이란 단(壇)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왕조이래 이곳에는 임금이하 백관(百官)이 나와 선잠을 제사하고 왕비(王妃)는 손수 친잠례(親蠶禮)를 베풀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같이 옷을 입게 해 준 것을 신명(神明)에게 감사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감사는 경건한 한국인의 순천사상(順天思想)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잠업을 장려하고 또 잠업을 신성시하고 또 옷을 소중히 여기게 하는 일련의 아름다운 습속이기도 하다.

  1. 무명

2. 무명

고려 말에 들어온 무명(木棉)은 한국의류사나 직물사에 가장 큰 혁명을 일으켰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명주 말고 식물의 섬유로 옷을 짜입은 포직(布織)과 짐승의 털로 옷을 짜입은 모직(毛織)으로 생활해 왔다.

포직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삼(麻)이었다. 삼은 여름옷을 만드는 천의 주류를 이루었다. 지금 이 삼베는 상복(喪服)용 이외에 이렇다할 용도가 없다.

삼 말고 모시풀(紵麻)도 신라 경문왕(861-874) 때의 해외 수출품이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미 그 이전부터 모시는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모시풀은 껍데기를 벗기어 볕에 잘 말려야 한다. 조금만 젖어도 쉬이 썩는다. 저피를 가늘게 자를 때 물에 적셔야 되는데 이때도 20각(刻 5시간)안에 끝내야지 이 시간을 초과하면 안 된다. 습기를 피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벗기지 않고 두어도 썩는다. 무명이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 서민들은 주로 이 포직물을 입었으며 겨울에는 삼찌꺼기를 솜으로 대신해서 체온을 보존했던 것이다.

무명의 원산지는 인도로 되어 있다. 서기 8백년 전에 편찬된 마누 법전(法典)에 이 무명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인도에서는 꽤 오랜 무명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재배 식물과는 달리 더디게 전파되었다. 왜냐하면 중국 남부에 무명을 가꾸고 무명 길쌈을 시작한 것이 13세기 말엽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솜을 타는 기구들이 없어 손으로 씨앗을 골라냈고 활로서 솜을 탓기에 무척 힘이 들었는데 황도파(黃道婆)란 할미가 와서 방적(紡績)의 베틀을 만들고 가르쳤기에 면포가 드디어 중국천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이 중국에 무명이 들어온 지 60년 후에 한국에 옮겨 오게 된 것이다. 무명 씨앗을 가져온 분은 알다시피 문익점(文益漸)이다. 문익점이 죽은 이태조(李太祖) 7년 7월에 실록을 보면

‘전좌사의대부(前左司議大夫)인 문익점이 죽다” 익점은 보주 강성현 사람으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을 이어 독서를 하다가 공민왕 경자년(庚子年)에 등과해서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 박사(博士), 좌정언(左正言)의 벼슬을 하다가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엇다. 돌아올 무렵 길가에서 무명 나무를 보고 그 열매 10개를 따 배낭 속에 넣고 돌아와 갑진년(甲辰年, 공민왕 13년 1364년)에 고향인 보주(普州)에 와서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에게 그 절반을 주어 가꾸도록 했던 것이다. 그 씨를 뿌렸더니 모두 죽고 한 씨앗만이 싹을 틔워 가을에 천익이 1백여 종자를 얻은 것이다. 해마다 이 씨앗을 심어 정미년(丁未年) 춘분(春分)에는 그 무명 씨앗을 마을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권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익점은 나눠주고 남은 절반을 스스로 심었던 것인데 모두 싹이 돋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호승(胡僧)인 홍원(弘願)이 우연히 정천익의 집에 들러 이 무명 나무를 보고 자기 고향 생각이 나 감격해 울면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솜타고 길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천익은 이 호(胡)나라 중에게 배운 바를 그의 가비(家婢)에게 가르쳐 무명 한 필을 짜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길쌈을 이웃에게 전하고 이웃은 다시 이웃 동리에 전해 드디어 10년이 못 되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명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 때부터인 것 같다. 태종10년 (1410) 4월에는 문익점의 공로가 백성에게 베푼 바 지대하니 고향에다 사당을 짓고 제사토록 한 것 등은 이미 그 면업이 백성들 실생활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 되겠다.

물레는 갸름한 고치(棉捧)에서 실을 뽑아내는 간단한 도구다. 8각 또 6각의 둥근 수레를 동줄이라는 실로 엮어 굴대로 물렛줄을 돌리면 그 줄에 연결된 괴머리의 물레가락이 급회전을 하면서 실을 뽑아내어 그 토리에 감기게 된다. 곧 물레의 굴대 한 번 돌리는데 물레가락이 수백 번 돌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1. 모시

3. 모시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보면 모시의 원료인 저마(苧麻)는 7~8척이나 자라는 초목으로 잎은 딱 나뭇잎 같이 겉도 하얗고 뒤도 하얗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가는 이삭같은 파란 꽃이 피고 뿌리는 황백색으로 가볍고 약하다. 뿌리는 겨울을 나고 봄이면 싹이 돋아 1년에 세 번쯤 베어 쓸 수가 있다 했다. 저마는 껍질을 벗겨 모시를 짜는 용도 이외에도 여러 가지 민속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흉년이 들었을 때 그 잎을 쪄먹기도 하는 구황식(救荒食)이기도 하려니와 민간요법의 약재로도 널리 쓰여 왔다. 이 저마의 잎은 피를 멎게 하는 지혈(止血) 성분이 있다 해서 내복약 도는 주술(呪術)로도 흔히 이용했다. 내복약으로는 음력 5월 5일에 그 잎을 따서 음지에서 말린 다음 가루내어 먹거나 밀가루에 짓이겨 단자(團子)를 만들어 놓고도 먹는다. 다친 사람 그리고 멍든 데, 내출혈에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마 잎을 말려 산부(産婦)가 베는 벼갯속을 하면 산후의 출혈을 막아주면 또 산부의 배 위에다 이 저마를 얹어놓기만 해도 피가 멎고 복통이 멎는다 하여 주술적으로도 이용했던 것이다.

모시의 고장인 충청도 한산, 당진 지방의 모시재배로부터 모시짜기까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시는 뿌리로 증식하는데 그 시기는 대개 음력 정월 그믐께 옮겨심는다.

2월부터 새싹이 나기 시작해서 음력 4월 그믐께면 완전히 자라 초벌을 벤다. 그러면 다시 자생하여 6월 그믐께 두 벌째, 팔월 그믐께 세벌째를 벤다.

종자로 심으면 심은 이듬해부터 재료로 쓸 수 있고 한 번 파종으로 대개 10년 동안 뿌리로 증식시킨다. 겨울을 나는 뿌리는 추위에 약하기에 봄까지 짚으로 잘 덮어 얼어죽지 않도록 한다.

이같이 훑어낸 모시를 가늘게 짼다. 모시를 왼손 엄지손가락에 감아쥐고 손톱 끝으로 째기도 하는데 주로 이빨로 짼다. 모시 길쌈으로 늙은 부녀자들의 이빨은 대개 이 모시째기 때문에 이빨이 마치 톱니처럼 들쑥날쑥하다.

대개 이 모시찌기는 두레 형식으로 공동작업을 한다.

이같이 훑어 짼 다음 과정은 짼 모시를 연결하는 과정으로 모시삼기라 한다. 손바닥에 침을 탁 뱉은 다음 한 모시의 위쪽과 다른 모시의 아래쪽을 맺은 다음 허벅지에 대고 비벼서 연결시킨다. 모시삼기도 째기처럼 공동작업의 방식을 택한다.

모시 훑기나 째기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하기도 하지만 이 모시 삼기는 절대로 야외에서 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노출시켜서는 안 될 허벅지를 드러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로 방안에서 하거나 밤에 달빛 아래서 작업을 한다.

모시올이 굵고 가늘기에 따라 새의 선택이 좌우된다. 모시의 새는 여섯 새에서 보름 새까지 있는데 새가 클수록 고급품인 세모시가 되면, 가장 가늘게 짜는 보름새 모시는 옷으로 만들어 물에 적셔 사발에 넣으면 사발 속에 들어갈 수 있을만큼 가늘고 곱다하여 사발옷이라고도 부른다. 열 개의 모시올을 여덟번 오락가락하면 한 새가 되므로 새가 높아질수록 실올이 많이 든다.

몇 새 모시를 짜야겠다고 결정되면 실뭉치 열 개를 펼쳐놓고 그 열 개의 실끝을 고무대의 구멍에 꿰어 베를 말게 된다. 이 고무대의 구멍에서 나온 올은 날틀과 걸틀에 거는데 이때의 길이는 필 단위로 처리가 된다.

이같이 모시날기가 끝나면 생콩을 갈아서 풀을 먹이는 모시매기 과정이 뒤따른다. 이때 먹인 풀이 빨리 마르도록 그 날실 밑에 완만한 겻불을 땐다. 이로서 베틀에 걸기 전까지의 과정이 끝난다.

한국의 직물에 있어 면직(綿織), 모직(毛織), 마직(麻織)은 거의가 기계화되어 양산(量産)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오로지 우리 전통적 옷감인 모시의 직조, 저직(苧織) 만은 기계화가 안 된다. 그 야유는 이 모시가 지닌 묘미로 손으로 터득해야만 하는 어떤 경지를 가장 많이 요구하는 특성을 지닌 직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지, 저고리는 계절이나 지방에 따라 옷감 만드는 방법, 입는 방법 따위가 조금씩 달랐다. 여름에는 삼베, 모시로 지었고 저고리 밑에 등거리 적삼, 잠방이 같은 것을 받쳐 입었다. 봄, 가을에는 모시를 겹으로 다듬어 지어 입었고 겨울에는 솜을 얇게 누빈 누비옷을 입었다. 솜을 두고 누빈 옷을 통틀어서 납의라고 하였고 솜옷으로 핫저고리, 핫바지 같은 것이 있었다. 학저고리 위에는 저고리보다 길이가 긴 배자를 입기도 하였다.

두루마기는 오랫동안 보편적으로 사용한 겉옷이다. 조선 초기의 두루마기는 목판깃이나 칼깃이고 옷 길이가 종아리에 오고 소매도 좁고 품이 상당히 넓은 두루 막힌 옷이었다. 그러던 것이 동그래깃이 되고 무와 옷고름이 첨가되어 오늘날과 같은 두루마기로 정착되었다.

여름에는 모시 홑단 두루마기, 봄과 가을에는 목면 두루마가. 겨울에는 솜을 두어 만든 솜 두루마기, 와 누비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었다.

우리 고유의 두루마기 형식은 왕과 백관의 예복으로도 사용되었다. 두루마기가 직령과 곡령으로 나뉘어 왕의 면복과 백관의 융복은 직령이었고, 왕의 곤룡복와 백관의 공복과 상복은 곡령이었다. 곡령은 중국의 외래적인 요소를 우리 것으로 수용한 것이다.

세모시

중국역사상 가장 발이 작은 미인은 양귀비(楊貴妃)다. 그녀의 신발 길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겨우 1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가벼운 미인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사랑을 받았던 비연(飛燕)이다. 비연은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한다. 가장 여윈 나약미의 금메달리스트는 당나라 때의 설요영(薛搖英)이다. 고문헌인 《전증시주(全曾詩주)》에 보면 어찌나 몸이 나약했던지 바람이 좀 부는 날이면 양쪽에서 부축받고 나들이해야 했고 여느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는 무거워서 활동은커녕 지탱도 하지 못했다 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옷감이 신라(新羅)에서 나는 용견(龍絹)이라는 명주였다. 당나라 귀족들이 다투어 구했던 신라의 명주로는 용견말고도 조로주(朝露紬)와 어아주(魚兒紬)가 있었는데 그 모두 섬세하고 가볍고 하얗고 투명하기고 소문나 있었다. 가볍고 투명하고 섬세하다는 특징들로 미루어 용견이나 조로주, 어아주의 재료가 모시나 명주 아닌가 싶어진다.

고려 때 임금이나 중신들의 여름옷으로 시(시)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신라의 직조기술을 이어받은 모시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그렇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보면 충렬왕 2년에 한 여승이 흰 모시 한 필을 임금에게 바쳤는데 올의 가늘기가 매미날개 같았으며 거기에 꽃무늬를 수놓았는데 마치 살아 있는 꽃 같았다 한다 조선조에도 모시 한 필이 죽통(竹筒) 안에 들어갈 만큼 가늘다 하여 죽통모시, 사발 하나에 들어갈 만큼 가늘다 하여 사발모시라는 세모시가 있었다.

지금도 우리 한국인이 손재간 좋고 섬세하기로 소문나 있는데 옛날에도 그 손재간이 모시 길쌈에 투영되어 찬란한 직조문화를 계승해 내려왔던 것이다.

모직이나 면직, 합성섬유 등은 살갗에 들러붙어 여름옷으로 부적합한 겨울형 옷이다. 그것을 세상사람들은 여름에도 입고 산다. 이에 비해 모시와 명주는 살갗에 들어붙지 않고 통풍공간을 확보해주는 데다가 작은 구멍마다 바람이 솔솔 드나들게 돼 있는 여름형 옷이다.

모시로 차려입으면 체형이 밉더라도 옷매무새가 그것을 은폐해주고 또 육선(肉線)도 어렴풋이 드러나서 약간의 노출욕도 충족시켜주니 십상이 아닐 수 없다.

바람난 여자를 두고 ‘홑모시 치마 장(場) 나들이’라 빗대고, 놀라 도망치는 모양을 ‘홑모시 첨지 동네 샘가에 나타나듯 한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모시가 대행해 준 노출욕구 충족을 짐작할 수 있다 속에 고쟁이나 잠방이를 입지 않은 홑모시는 속살을 투시해주기 때문이다.

세모시 패션은 삼국시대 이래의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다 한복 뿐 아니라 양장으로까지 파급되고 있으며, 단색뿐 아니라 열두 색으로 염색되어 모시작품 내놓지 않은 다자이너나 양장점이 없을 정도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양질의 여름형 옷인 데다가 약간의 노출기능, 그리고 육체절 결함의 은폐기능이라는 현대감각이 가미되고 전통에의 회귀라는 시대사조가 복합된 세모시 유행이다.

이규태 코너 7《신바람의 한국학》 Page 15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