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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1. 우리의 복색과 무늬

우리의 복색과 무늬

노랑색은 중앙색으로 소위 중국의 천자(天子)가 입는 천자색이었다. 그리하여 세종 27년에는 천자색인 황색(黃色), 자색(紫色), 현색(玄色)을 입지 못하게끔 금령으로 공포하고 세종 자신도 붉은 옷으로 곤룡포를 지어 입었던 것이다.

태종 때까지는 모든 관리에게 짙은 남색 옷이나 검붉은 옷을 입도록 장려했던 것인데, 세종조에 이르러서는 각 관청의 하급 관리와 지방의 관리, 그리고 상공(商工)에 종사하는 사람, 노비 등 천민에게는 붉은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대궐을 제외한 어느 곳에서도 자색(紫色) 옷은 입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또 고급관리의 위품과 품위를 위해 서민이 입는 흰 옷을 입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복색(服色)으로 계급을 구분하였던 것이다.

선조(宣祖) 때 전란(戰亂) 중과 전후(戰後)에는 비상복(非常服)으로 위아래 검은 옷을 입도록 했으나 질서가 회복되면서부터 당상(堂上: 正二品 이상)은 남색 옷을, 그 이하는 검은 옷을 입도록 했다.

성종(成宗) 때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공복(公服)에 있어 일품(一品), 이품(二品), 삼품정(三品正)까지는 붉은 옷, 삼품종(三品從)에서 사(四), 오(五), 육품(六品)까지는 푸른 옷, 칠(七), 팔(八), 구품(九品)은 초록빛 옷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의 붉은 염료는 붉은 흙(朱土)을 밭쳐 만든 토홍(土紅)과 단목(丹木)을 나무에서 따내어 만든 목홍(木紅), 그리고 잇꽃으로 만든 진홍(眞紅) 세 가지가 있었다. 한데 세상이 점차 사치스러워져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모두 잇꽃에서 따는 진홍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잇꽃으로 염색을 하는데 비용이 허다하게 들어 돈있는 집 이외에는 엄두도 못 낸다 했다. 한 가지 옷을 염색 할 만한 잇꽃의 종자밭은, 식구가 넷인 집의 한 달 양식을 털게될 만큼 넓은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 서민의 전통적 복색으로 갈옷으로 불린, 감물 빛이다. 그것은 미감(美感)과는 전혀 관계 없는 빛깔이긴 하나 노동하는 서민의 복색으로 흰 옷과 더불어 가장 보편적인 복색이었던 것이다. 이 갈옷의 장점은 감물에 의해 갈색으로 염색되었기로 더러움을 덜타고 빨래할 때 세제를 쓰지 않아도 때가 잘 빠질 뿐더러 푸새 등 다른 잔손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옛날 군복에 이 갈옷을 많이 이용한 뜻은 방부(防腐) 작용이 있어 좀이나 벌레가 일지 않을 뿐더러 화살이나 총탄에 강해 방탄 구실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땀에 젖은 옷을 그냥 두어도 썩거나 상하는 일이 별로 없었고 통풍이 잘 될 뿐더러 가시 같은 잡물이 붙지도 않는다. 일하다가 갈옷 입은 채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일을 해도 베가 몸에 붙질 않으며 열의 전도율이 극히 낮아 직사광선 아래서의 작업복으로는 십상이라 한다.

한 벌이면 2년을 입는 질긴 것도 장점이고 7~8월경 풋감을 따서 절구로 으깨어 즙을 낸다. 여느 옷에 풀먹이듯이 풋감즙과 으깬 찌꺼기에 옷을 넣어 주물러서 햇볕에 말린다. 마른 다음에 물을 추기면서 10여일 동안 정성들여 말리면 황토빛이 떠오르고 빳빳해진다. 갈옷의 서민 복색은 현재 제주도에만 남아 있다.

연지곤지 바르고 시집간다고들한다. 이 연지(燕脂)가 곧 볼과 이마에 칠하는 붉은 화장품이기도 하지만 옷감에 붉은 물을 들이는 가장 전통적인 염료이기도 하다. 연지란 말은 곧 유명한 연나라의 홍화(紅花)로 만든 염료란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연지의 원료인 홍화는 홍람화(紅藍花)라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잇꽃이라 부른다. 국화과에 속하는 2년생 초화(草花)로 여뀌와 비슷하게 생겼고 붉고 누른 빛의 꽃이 된다. 이집트가 원산지로 유럽, 인도, 중국에서 많이 재배되고, 한국에서도 중부 지방 이북에서 산발적으로 재배했었다. 잇꽃의 줄기는 미끄럽고 30cm~90cm까지 큰다. 잎은 황녹색으로 2치~5치까지 자라며 6월경에 홍황색(紅黃色)의 두장화서(頭狀花序)의 꽃이 피고, 꽃이 지면 흰 색을 띤 타원형의 팥만한 마른열매가 맺는다. 잇꽃의 줄기와 잎은 연할 때 식용으로 하며, 그 화관(花冠)을 따 말린 것을 홍화라 한다. 이 홍화는 이른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해뜨기 전, 새벽 이슬이 스러지기 전에 따야 한다.

잇꽃물을 들인 흰 명주를 탈색할 수도 있다. 물들인 명주를 물에 적신 다음 잿물을 떨어뜨리면 깨끗이 붉은 물이 빠져 흰색으로 환원해 버린다.

이같이 빠진 잇꽃물은 녹두가루에 스며두었다가 다시 물들일 필요가 있을때 그 녹두가루에서 잇꽃물을 짜내어 물을 들이면 단 한 방울도 낭비가 되지 않는다.

연홍(連紅), 도홍(桃紅-복숭아꽃 빛깔), 은홍(銀紅), 수홍(水紅-회색빛이 나는 분홍색) 등 홍색의 다양함은 이 홍화떡의 농도를 가감함으로써 염색할 수 있으나, 꽃자주와 같은 진한 붉은 색은 홍화로는 못 들이고 지치(芝草)라는 다년생 초화를 썼다.

쪽물(남빛 물감)은 여뀌과에 속하는 1년생 초화인 쪽의 잎줄기에서 원료를 얻는다. 쪽물을 들인 다음에는 반드시 음지에서 말려야 하고 다 마를 때까지 부채질을 하면 오랫동안 변색되지 않는다.

옥(玉)색 물감은 갈매나무의 열매에 백반을 섞어 들이기도 하나 대개는 남물들이고 난 쪽물에 들인다. 이 남색 끝물에 들이면 짙은 옥색이 되고 옅은 옥색을 원하면 물에 쪽즙을 약간 섞은 다음 여러 번 얼음물에 헹구면 된다.

초록색 염료는 회나무의 채 피지 않은 꽃이다. 절반쯤 피었을 때 따내어 잘 말려서 둔다. 물들인 초록색에 노란 빛이 돌거나 또 입을수록 노란 빛이 나면 그것은 회나무 꽃이 반개했을 때 딴 것이 아니라 너무 펴 있을 때 딴 증거이다.

녹두 빛깔은 미나리 아제비과에 속하는 왜황련(倭黃蓮)을 담근 물이 좋으나 이 황련은 희귀하기에 우리 선조들은 황백(黃栢)나무 껍질에서 나온 진으로 여러 번 물을 들여 녹두빛을 내었다. 이 진에다 울금풀을 섞어 푸른 빛을 돋보이게도 했다.

보라빛은 남녀가 유별(有別)했다. 바꿔말하면 남자 보라와 여자 보라가 구분되어 있었으며 남자가 여자 보라를, 여자가 남자 보라의 물감 옷을 입고 다니면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여자 보라는 짙은 옥색에 연지를 먹이는 복합 염색이고, 남자 보라는 연한 쪽빛에 연지빛을 먹이는 복합 염색이다.

회색은 당묵(唐墨)을 잘 갈아 물에 타고 신 초를 약산 쳐서 명주나 비단에 다 들이면 약간 붉고 푸른 기운이 되는 짙은 잿빛이 된다.

염료 중에 가장 어렵고 발달된 염료로 치는 베이지색 물감도 우리 선조들은 들일 줄 알았다. 낙타 빛깔 같아서 타색(駝色)으로 통칭되어온 이 베이지 색은 큰 뽕나무 굵은 가지를 베고 그 속의 붉은 고갱이를 원료로 삼았다.

이같은 염색 옷은 빨 때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다홍은 오미자나 매실물에 빨아야 그 빛깔이 성하고, 꽃자주는 오줌에 빨아야 변색을 하지 않는다. 쪽빛은 녹두물이나 순두부물에 빨아야 변색이 없고 초록은 초를 타서 빨아야 색이 산다.

물감 옷을 풀먹이는 데도 빛깔에 따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청홍황백흑(靑紅黃白黑) 오색에 흰 풀을 먹이면 다 고우나 오색만은 풀을 먹이지 말고 밤에 이슬이나 서리를 흡족히 맞힌 다음 다듬어야 좋다. 짙은 푸른빛은 아교풀이 좋고 보라는 토란을 생으로 갈아 그 즙을 먹인다.

우리 옛 선조들의 옷색, 옷의 구조, 옷 입는 법 등에는 계급의식이 숨쉬고 있었다. 대체로 붉은 색, 노란 색, 자색은 존색(尊色)으로 여느 사람들은 일생에 시집갈 때 단 한 번 입는 이외에는 금단의 복색(服色)이었다. 이 밖에 삼호장 저고리는 신부에 국한됐다든지, 끝동 빛깔에도 붉은 색은 신부, 아들을 낳은 부인에 국한하여 청색 끝동을 달 수 있다던지 그 격식과 법도가 엄했던 것이다. 옷고름도 내외가 다 함께 생존해 있어야만이 자주빛을 쓰고 그렇지 못하면 저고리 빛과 같은 옷색으로 옷고름을 접어야 했다.

한국인의 복색과 옷입는 격식은 이토록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육당 최남선은 태양숭배나 경천사상의 신성한 색으로서 ‘밝’--- 곧 백(白)을 들고 백의의 뿌리를 찾고 있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돌, 결혼, 회갑 같은 날과 설, 단오, 추석 같은 명절에도 때때옷 같은 울긋불긋한 인공색 옷을 입는다.

그렇지 않은 평소에는 채색을 배제한 자연색을 취했다. 우리가 사는 집의 기둥이며 벽이며 마루며 먹는 밥그릇이며 숟가락이며 그 모두가 자연색인데 예외가 없다. 옷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고대부터 우리 조상대대로 입어온 의료인 저포나 견포, 면포는 그 자연대로의 색이 하얗고 마포만은 노란빛이나 빨수록 탈색되어 결국은 하얀빛이 된다.

하얀 옷을 의도적으로 굳이 입으려 해서 백의민족이 되었다기보다 의료의 자연색이 하얗기에 백의민족이 됐고 하얀 옷을 입어야만이 그 체계의 보편성 때문에 안정이 되기에 하얀 옷을 추구하게 됐음직하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인이 원색 계통의 옷을 기피하고 회색, 감색, 갈색 같이 드러나지 않는 빛깔의 옷을 즐겨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