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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여자 복식

여자 복식

여자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적삼, 치마, 단속곳, 바지, 속속곳, 다리속곳에 버선과 신이었다. 남자 저고리와 같았던 여자 저고리가 고려 말에서 조선조로 오면서 깃, 도련, 소맷부리의 선이 삼회장 저고리로 된 것이 여자저고리에서의 독특한 변화였다.

조선 시대에는 저고리 삼작이라하여 속적삼, 속저고리, 저고리를 겹쳐서 입는 것이 예의였다. 양반 부녀의 치마는 넓고 길었으며 치마에 금직이나 금박을 놓은 스란 단을 대었다. 조선시대의 치마는 독특한 실루엣을 갖는데 속옷을 일고 여덟 겹을 겹쳐 입어 둔부를 부풀렸기 때문이다. 조선조 여자들은 치마 밑에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단속곳을 순서대로 입었다. 단속곳은 일반 부녀의 속옷 중에 치마 바로 아래에 입던 속옷으로 겉 속곳이라고 불렀으며 치마사이로 보였다. 따라서 고급 옷감으로 바느질도 정교하게 해서 입었다.

장신구의 사용은 상류층이 아니면 혼례 예복을 입을 때만 허용 하였다. 궁중과 반가에서는 10월에서 정월까지는 금반지, 2, 3, 4, 8, 9월에는 은 칠보반지, 5, 6, 7월에는 옥가락지를 끼었다.

노리개는 겉고름, 안고름, 치마허리에 찬다.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침낭, 장도와 같이 실용적인 면에서도 찼다.

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 사용 하였다. 또 여기에 은 젓가락을 매달아 음식중의 독의 유무를 알아 보는데 사용했다.

초기 저고리는 등 길이가 남자처럼 허리 밑까지 왔고 소매는 직배래에 통수였고 소매 길이는손등을 덮을 정도였으나 깃은 목판깃과 반목판깃이 공존했고 섶 끝동이 넓고 곁마기가 있었다.

중기에는 등 길이가 길어졌고 반목판깃이 많아졋고 안섶이 좁아졌다. 겉옷은 윗부분이 넓어짐에 따라 섶선의 경사도 심해졌으며 곁마기는 배래선을 따라 나갔다. 또 끝동이 좁아졌다.

후기에는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으며 당코식이 등장했고 깃 너비도 매우 좁아졌다. 또 섶, 끝동, 동정도 좁아져 저고기 전체가 작아졌다.

그런데 독일의 박물학자 시볼트(1796~1866)가 19세기 중엽에 그렸다는 ‘조선의 어부 일가’에서는 어부 부인이 매우 긴 저고리를 입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삼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긴 저고리와 짧은 저고리가 공존하는 저고리 유행의 이중구조를 볼 수 있다.

한편 조선 말의 짧은 저고리에는 ‘졸잇말’이 필요했다. 졸잇말은 가슴의 성장을 억제시키기 위해 베로 만든 것이었다. 또 저고리 길이가 극심하게 짧아져 겨드랑이 살을 가릴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가리개용 허리띠가 등장하였다. 이 띠는 너비 한 자쯤으로 목면과 명주로 만들었고 겨울에는 솜을 두어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 삼작이라 하여 속적삼, 속저고리, 저고리를 겹쳐 입는 것이 예의였다. 여자 저고리는 계절마다 재료가 달랐고 겨울에는 저고리 위에 배자나 털가죽으로 속을 댄 갓저고리를 덧입었다.

치마는 길이와 넓이가 쓰임새에 따라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치마는 신분을 표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양반 부녀의 치마는 넓고 길었으며 치마에 금직이나 금박을 놓은 스란단을 대었다. 일반 부녀는 민치마를 입었고 하속배는 두루치하느 치마를 입었다. 두루치는 민치마보다 폭이 좁고 길이가 짧아 속바지가 보일 정도였다. 백정의 부녀는 치마 가장자기에 검은 헝겁을 달게 하여 일반 부녀와 쉽게 구분하였다.

조선 시대의 치마는 속옷을 일고여덟겹을 겹쳐 입어 둔부를 부풀렸다. 많은 속옷을 덮으려면 폭 넓은 치마가 필요했다.

속옷에는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너른바지, 단속곳, 무지기, 대슘치마 따위가 있었다.

가장 밑에 입던 다리속곳은 계절에 관계없이 흰 목면으로 만들어 허리띠를 달아 입었다. 다리속곳 위에는 속속곳을 입었다. 이것은 부드러운 면이나 명주로 했고 여름에는 베가 굵은 모시로 했다. 바지의 종류도 속치마형 바지, 밑이 없고 양다리만 있는 남자 양복형 바지, 밑과 뒤가 트여 여미는 어린이 풍차바지형의 바지, 밑에 무가 두 개 있고 밑이 트인 여자 고쟁이형 바지, 가랭이가 상당히 넓고 밑이 막힌 단속곳형의 너른 바지. 밑이 막힌 개량바지, 밑이 트인 조끼 허리형 바지, 앞과 밑이 막히고 뒤의 엉덩이만 트인 바지, 허리 둘레로 돌아가면서 16개 정도의 창구멍이 난 안동 지방의 민속복, 살창 고장주의 등의로 아주 많다. 또 무릎 아래를 좁게 누벼 뻗치게 하거나 무릎 아래에 베나 모시를 대어 ‘페티코트’ 역할을 하게 한 중동이 바지도 볼 수 있다. 아름다움과 기능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이들 속바지는 독특한 속옷 문화를 형성했다.

단속솟은 일반 부녀의 속옷 중에 치마 바로 아래에 입던 속옷으로 겉속곳이라고도 불렸으며 치마 사이로 보였다. 따라서 고급 옷감으로 치마만큼 신경을 쓰고 바느질도 정교하게 했다.

이밖에도 궁중과 반가에서 예복에 입던 무지기(無足伊), 대슘치마가 있었다. 3층으로 된 삼합 무지기부터 7층으로 이은 칠합 무지기까지 있었다. 이런 속옷 풍속은 1920년대부터 단순화되어 다리속곳, 속속곳은 팬티로 여자 바지는 그대로 속바지로, 단속곳과 무지기는 속치마로 대치되었다.

장옷은 두루마기와 같은 형태로 소매 끝동을 백색으로 대었고 깃, 고름, 겨드랑이의 삼각무를 다른 옷감으로 장식했다. 장옷의 앞 부분이 이마에 오도록 두른 뒤 양깃 끝에 달린 고름을 턱 밑에서 여며 주었다.

쓰개치마는 여자의 치마와 같이 만들어 뒷말기를 단 것으로 허리 말기가 이마를 덮을 정도로 쓰고 양 끝에 달린 치마 끝을 모아 손으로 잡았다. 삿갓은 경기 이북 지방에서 많이 썼다. 이 밖에도 겨울에는 아얌, 조바위, 남바위. 풍차, 볼끼, 굴레 같은 따뜻한 모자를 사용했다.

장신구는 귀고리,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기본 복식에 포함 되었다. 장신구의 사용은 상류층이 아니면 일반 서민의 경우 혼례 예복을 입을 때만 허용되었다. 귀걸이는 귓바퀴에 걸었다. 반지는 칠보, 옷, 마노, 호박, 비취, 동 같은 것으로 만들어 계절에 맞추어 끼었다. 여름에는 옥 종류를 겨울에는 금속 반지를 끼었다.

노리개는 겉고름, 안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찼으며 화려하고 섬세하며 다양하여 궁중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자들이 즐겨 찼다.

대례복에는 삼작 노리개를 차고 명절이나 평상시에슨 단작 노리개를 찼다.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액을 피하는 따위로 어떤 염원을 위해 차기도 했고 향갑, 향낭, 침낭, 장도와 같이 실용적인 면에서 찬 것도 있다. 침낭은 바늘을 꽂아 두던 바늘집으로 부녀자들이 늘 사용하는 바늘을 손쉽게 찾아 쓰기 위한 것이었다.

장도는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도 사용하였다. 또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 중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여자 복식 종류

.저고리의 종류


속적삼과 속저고리


여자 저고리


여자 치마



치마 허리의 종류


배자


여자 마고자


여자 두루마기


단속곳과 속속곳


고쟁이


활옷

여자의 한복 입는 순서

여자의 한복 입는 순서

1. 기본 속옷을 입고 속 바지를 입는다.

2. 속치마를 입는다.

3. 치마를 입는다. 뒤가 트이는 경우에는 뒷 중심에서 양쪽으로 7cm쯤 겹치게 입는다. 치마자락은 오른쪽자락이 위가 되도록 여며서 된 쪽이 트이게 한다.

4. 속적삼을 입는다.

5. 버선을 신는다. 버선 솔기가 중앙을 마주 보도록 신는다.

6. 저고리를 입는다. 먼저 동정니를 맞추어 안고름을 매고, 다음에 겉고름을 맨다.

고름을 바르게 매야 맵시 있고 품위 있게 보인다.

7. 진동선의 구김을 정리하고, 깃 고대와 어깨솔기가 위로 넘어가지 않게 약간 앞으로 숙여 입는다. 치마허리가 저고리 도련 밑으로 보이지 않게 하고, 치마 끝으로 버선이 보이지 않도록 정리한다.

8. 노리개는 저고리의 긴 고름에 노리개의 고리를 끼워 놓고 고름을 맨다. 치마허리 끈에 끼워 달기도 한다.

9. 두루마기를 입는다. 외출 할 때는 목도리를 매기도 한다.

장옷

장옷

장옷은 머리에서부터 무릎 밑까지 내려 쓰는 면사포 같은 것으로 초록바탕에 흰 끝동을 다는 것이 상례로 두루마기를 머리부터 둘러 쓴 것을 상상하면 된다. 시대적으로 보면 세조(世祖) 연간부터 이 장옷을 입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미혼 남녀는 주로 검은색 신을 신었는데 신코와 신들메는 없었다. 조선 말에 남녀의 장식신으로 꽃미투리와 꽃신이 있었고 일반 서민은 짚신, 미투리, 나막신 들을 주로 신었다. 조선 시대 남녀 모두가 우장용으로는 나막신을 신었다. 조선 말에 종이로 만든 미투리를 신기도 했다.

여인들의 옷

여인들의 옷을 보아도 그것은 순결과 정조를 지키려는 의지적인 것이다. 옷이 남자들의 관능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미가 드러나지 않고 몸을 선으로 감싸고 있다.

그림은 선과 색채와 형태로 이루어 지는데 한복은 선이 중심이 되는 한 폭의 그림이다. 여인들이 입고 다니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우아한 그림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인이 타오는 상이란 의상밖에 없다고 하니 선으로 된 우리의 의상이 얼마나 다른 복장에 비해 뛰어난가 잘 보여주고 있다.

웃옷을 보면 네 가지씩이나 입는다. 속저고리를 세 벌 입는데 맨 아래는 분홍색,다음에는 노란색, 그 다음에는 연두색 속저고리를 입고 네 번째 겉저고리를 입는다. 아래로는 일곱 가지를 입는다. 처음으로 다리속곳을 입고 그 위에 속속곳, 그 위에 바지, 그 위에 단속곳, 그 위에 무지기, 그리고 속치마를 입고 일곱 번째로 겉치마를 입는다. 옷마다 끈을 매게 돼 있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머리만 해도 기름을 발라 곱게 빗어서 땋고, 그리고 거기에다 댕기를 드리우고 쪽을 단정히 틀어 비녀를 꼽는다. 순결과 정조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한 복장으로 중무장을 한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이러한 옷을 손수 길쌈을 하고 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하고 바느질로 옷을 지은 다음 에 또 다려 하나하나 끈을 매어가며 구기지 않게 입는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정성이 든 옷을 입으니 행실이 바르고 조심스럽고 조용하고 모든 일에 정성스럽고 우아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조선조 왕가의 공주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숙(淑), 명(明), 정( 貞), 진( 眞), 순(順), 선( 善), 덕 (德)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맑고 밝고 곧고 참하고 순하고 선하고 덕을 갖춘 여인이 남자들이 이상으로 하는 여인상이라고 보겠다. `예쁘다'라고 하는 말은 `어엿브다'에서 변한 말이다. 이 `어엿브다'의 옛 뜻은 불쌍하고 가련하다의 뜻이다. 순결과 정조를 지키기 위해 참고 이겨나가는 의지와 고독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보면서도 그것을 예쁘게 보았던 것이 아닐까.

서정범,품봐 품봐, 청아출판사, 1992 p152-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