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한복의 비교 문화

한복에는 포켓이 없다. 저고리고 바지고, 밖이든 안이든 포켓이 엇다. 한복의 특색은 포켓이 없다는 데 있다.

이처럼 포켓을 거부하는 한국의 옷과 양복을 비교해 보자. 우선 양복 저고리만 해도 평균 여덟개의 포켓이 있다. 윗도리 아래 양쪽과 위쪽에 도합 세개, 아래 오른쪽 포켓 속에는 조그마한 새끼 포켓이 있어 겉만 보더라도 네 개다. 속은 윗 양쪽에 하나씩 그리고 오른쪽에 만년필꽂이 포켓과 그 아래 라이터 하나 들어갈만한 미니 포켓이 도 달려 있다.

바지에도 양쪽과 띠끈 아래에 미니 포켓이 달려 있다. 거기에다 조끼까지 입으면 겉 네 개에 속 하나가 더하고 와이셔츠 포켓까지 합치면 보통 14~15개의 포켓이 있는 셈이다.

사냥할 때 입는 사파리복이나 조종사들이 입는 조종복의 포겟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 포켓들에 지갑, 수첩, 잔돈 지갑, 각종 증명서, 명함, 자물쇠, 손수건, 담배, 라이터, 머리빗, 만년필, 볼펜, 안경, 구두주걱, 손톱깍이, 칼 등 꼴 필요한 것들을 넣고 다닌다. 거기다가 직업에 따라서 계산기, 소형 카메라 등 약간 무거운 휴대품이 늘어난다. 근대화될수록 이 휴대품은 늘어나는 추세에 있고 어쩌면 15개이 포켓으로 부족하여 앞으로의 양복에는 포켓이 더 늘어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옛날 한국은 포켓 문화가 아니라 요대 문화요, 소매 문화였다. 담뱃대나 부채는 허리춤의 띠에다가 꽂고 다닌다. 담배나 부싯돌은 주머니에 넣어 허리춤에 찬다. 관리들은 도장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땀수건은 옷소매에 넣고 다닌다. 한복의 옷 소매통은 바로 이 포켓을 거부하는 반동때문에 커진 것이다.

서양의 옷은 육체를 압박하게끔 조이는 그런 옷 문화계에 속하고 한국의 옷은 가급적 육체에 압박을 주기 않게끔 느슨하게 하는 그런 옷 문화계에 속한다. 그래서 서양의 옷은 조이는옷이요, 한국의 옷은 걸치는 옷이다.

양복 바지나 양복 스커트는 히프와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이는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바지통만은 유행에 따라 넓어졋다 좁아졌다 하나 19세기 이전의 서양 남자들 바지는 예외없이 발레리나가 입는 옷처럼 하체에 밀착되어 있는 것에 예외가 없었다. 상의도 몸에 딱맞게 지어 수많은 단추로 빈틈없이 조여놓고 있다. 거기에 목을 졸라매는 넥타이까지 연상하면 이 조이는 문화의 특성은 완연해질 것이다.

원피스나 블라우스도 외견상 조이지 않는 옷처럼 보이나 18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보이는 블라우스나 원피스의 타이트함은 육체가 터져나올 것만 같다.

양복이 몸에 타이트하게 조여입는데 비해 한복은 신체의 구조를 이용하여 그저 걸칠 뿐이다. 저고리는 어깨에 걸치는 옷이요, 걸쳐놓기만 하면 앞이 벌어지니까 옷고름으로 매어놓은 것일 뿐 옷고름이 서양의 단추나 후크나 지퍼처럼 조이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치마도 유방이라는 편리한 두 개의 육체적 돌기를 걸개로 삼아 치마말을 둘러 그 돌기의 상부에 걸쳐 맨다.

바지도 매기 좋은 허리의 구조에 걸쳐, 허리띠로 그 걸친 상태를 보강해서 입는다.

곧 옷고름이나 허리띠는 벌어지지 앟게 하고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도구일뿐 서양의 결속도구처럼 압박하고 조이는 도구는 아닌 것이다.

사람이 일을 하고 생각을 하는데 가장 쾌적한 온도가 몇 도나 되는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 그 결과를 밝히고 있다.

《기후와 문명(氣候와 文明)》이란 저술을 한 헌팅톤은 많은 자룔르 수집분석하여 육체 노동의 최적 온도는 섭씨 15℃~ 18℃요, 정신활동의 최적 온도는 그보다 한결 낮은 4℃~10℃라고 했다. 이같은 수치는 옷을 입고 있었을 때의 실내의 쾌적 온도를 나타낸 것으로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상태에서는 그 쾌적 기온이 달라진다.

맥스•루브너란 독일 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30℃라 하고, 한 일본핮자가 조사한 보로는 여름에 27.9℃요, 겨울에는 26.4℃라 했다.

루브너는 사람이 나체로 추위를 느끼는 기온은 25℃라 하고, 피부혈관의 수측 등 개인차는 있으나 보통 6.5도 내외의 체온능력을 갖고 있기에 20℃ 정도의 기온이면 나체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옷을 입고 있을 때의 외기 쾌적 온도와 우리 살갗이 느끼고 있는 쾌적 온도 사이에는 무려 15도 내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15도 내외의 온도를 조절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옷인 것이다.

외기가 일년 내내 쾌적 온도를 유지해 주는 법은 없다. 단 기온이 매일 매일 시간에 따라 변하기에 이 변화무쌍한 기온으로부터 인체를 쾌적 기온권을 유지하기 위해 옷이 있고 또 옷의 질이나 구조가 다양해진다.

옷의 기능 때문에 옷의 구조와 질은 외기의 차이에 따라 크게 변화를 일으킨다.

대체로 추운 지방의 한랭형(寒冷型) 의복과 더운 지방의 열서형(熱署型) 의복으로 대별되는데 한국처럼 겨울에는 한랭형 기후가 와서 지배하고, 여름에는 열서형 기후가 지배하는 나라에는 이 한랭형과 열서형 패턴이 약간씩 변형되어 같이 존재하며 절충•융합패턴의 옷을 형성시킨다.

열서형 의복에는 네 개의 기본형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허리에 베를 감아 늘어뜨리는 ‘요의형(腰衣型, Ioin cloth)’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스님이나 인도의 여자들이 입는 사리 같이 어깨로 베를 감아 입는 ‘가사의형(袈裟衣型)’, 베의 복판에 구멍을 뚫고 양 겨드랑이를 기우기만 하는 ‘관두의형(貫頭衣型)’, 그리고 고대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입었던 만토 또는 케이프 형태의 ‘만토형’이 그것이다.

네 가지 유형 모두가 재봉이나 바느질이 가해지지 않거나 가해져도 극히 간단히 처리한 무가공의 베나부랭이를 걸친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곧 체형에 맞게끔 복잡하게 재봉하는 한랭형 의복과는 달리 그저 장의형(長衣形)의 한 줄기 베폭이 기체(基體)가 되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몸에 감느냐에 따라 네 가지 기본 형식이 성립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로인 클로스, 곧 요의형이 한국 의상의 기본이 되고 있는 치마의 원형이 아닌가 싶다. 요의(腰衣)는 남미, 태평양제도, 오스트렐리아 북부, 동남아시아, 열대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 남부에까지 널리 분포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민족의상을 보면 남녀간에 스커트형의 것이 많다. 버마에서는 남녀간에 ‘론지이’라는 스커트형의 하의을 입는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지아 그리고 필리핀의 일부에서도 남자는 ‘사론’이라는 스커트를 입는다.

‘론지이’는 통형(筒型)으로 만들어진 스커트로, 배의 여분을 많이 남겨 오른쪽 허리로부터 왼쪽으로 휘감고 다닌다.

말레지아어로 ‘통(筒)’을 의미한다는 ‘사론’도 통형 하반신 스커트로 감고, 남은 부분을 좌우에서 접어 허리춤에 낀다는 것이 ‘론지이’와 다를 뿐 구조는 같다.

이 요의는 비록 하의라는 옷의 목적 이외에도 다목적으로 쓰이고 있다는데도 유럽풍의 스커트와 다르다.

‘사론’을 입고 그대로 물 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또 잠자리에서 시트로 쓰기도 하며, 길가나 나무 밑에 앉아서 잘 때 덮을 수 있는 홑이불도 된다. 또 볕을 가리는 차일과 커튼으로도 사용되었다.

스커트라는 점은 같으나 그 뿌리가 제각기 다른 두 개의 패턴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체형에 맞게끔 옷감을 재단해서 재봉을 한 한랭형(寒冷型), 재봉 등의 가공없이 허리에 둘러 드리우는 열서형(熱署型) 스커트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한복의 치마는 한랭형인가? 열서형인가? 순수한 열서형은 아닐지라도 그 구조나 입는 방법이 요의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 원조는 열서형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첫째, 치마말 부분이 약간 가공되어 있으나 치마를 벗어 놓으면 한 장의 옷감이라는 평면성이 요의와 같다.

둘째, 허리에 둘러맨다는 구조나 입는 방법이 요의와 같다. 남방의 요의에 비해 치마말과 치마끈이 달라졌을 뿐 그 입는 방법과 구조는 같다.

셋째, 한랭형의 스커트는 체형에 맞추어 바느질을 하는데 비해 한국의 치마는 요의처럼 하체를 감아 그 끝을 들고 다니거나 허리춤에 꽂는다. 곧 한랭형 스커트는 옷 속에 몸을 담는데 비해 우리의 치마는 몸에 옷을 감는다는 차이에서 요의형에 가깝다.

넷째, 치마는 옷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요의처럼 다목적으로 이용한다. 아이를 감싸 안을 때 포대기가 되고, 추운 바람이 불 때 둘러씀으로써 방풍복이 되기도 한다. 또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 쓰개치마가 되고,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흐를 때면 수건이 되며, 그릇을 닦을 때는 행주가되기도 한다.

또 치마끝을 붙들고 춤을 추면 무의(舞衣)가 되고 곡물을 담아 들고 오면 바구니도 된다. 한랭형 스커트가 전혀 이같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 치마의 뿌리는 요의랄 수 있다.

다섯째, 치마는 주로 남쪽에서 입었고 북쪽에서는 여자도 바지를 주로 입었다는 역사적 분포로 미루어 봐도 치마가 남방문화의 영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치마는 남방계 의문화의 북한계적인 형태로 봐야할 것이며 문화전파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날씨가 추운 지방에 있어 옷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능한 몸의 피부면이 바깥 공기나 바람에 직접 닿지 않게 감싸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에서 발산되는 열을 100%라 하면 피부를 통해 발산되는 양이 80% 내외이고, 폐에서 기관지를 통해 발산되는 분량이 20% 내외, 그리고 소화기에서 배설물을 통해 발산되는 분량이 2%내외라 한다. 곧 체령의 거의가 피부를 통해 발산되기에 이 체열발산을 방어하는 방법으로 의복이 발달한 것이다.

아주 추운 북극 에스키모인들의 옷은 얼굴만 노출하게 되어 있다. 얼굴은 전 피부 면적의 3.1~3.3%에 불과하다 한다. 비교적 고위도에 속하는 추눈 서구에서 만들어진 세비로는 목의 절반 이상과 손목 이하만 노출되고 있다. 이 얼굴과 손목 이하의 노출 면적은 전 면적으 15%이며 추운 계절에는 장갑을 끼고 모자를 씀으로써 노출 면적을 2%이하로 줄이고 있다.

이에 비하면 한복의 저고리는 세비로나 청복(淸服)에 비해 목의 중간 하반부와 가슴팍에 노출부분이 더 가산된다. 여기에 소매 밑부분의 노출까지 보태면 한복의 피부 노출 면적은 20~22%쯤 된다. 곧 양복보다 5~7%가 넓다.

즉 옷에 있어 피부면적의 노출은 이처럼 북위도가 높아짐에 따라 반비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한복 저고리의 동정부분의 구조는 이 한국적 풍토에 서 합리적임을 알 수 잇다.

두 번째, 옷의 개구부(開口部)의 크기와 그 개구부의 처리 여하로 한랭형 의류의 특징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의복의 내부에 있는 공기층의 대류(對流)로서 환기가 베풀어지고 있기에 곧 목, 소매, 바짓가랑이 등 개구부가 작을수록 보온성이 커진다.

에스키모의 옷은 상의와 머리를 덮고 있는 후드가 연결되어 목부분의 개구부로부터의 체열방출을 최대한으로 막고 있다. 양복에서 와이셔츠의 컬러를 세우고 넥타이로 죄어매는 것도 이 상향 개구부의 폐쇄를 의미한다.

청니들의 옷소매는 드리우면 손등이 가려질 만큼 길고 항상 두 손을 반대편 옷소매에 끼고 다님으로써 하향 개구부를 폐쇄하는 것이 옷입는 습관이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한복의 하향 개구부는 비교적 개방적이다.

저고리 하단의 개구부도 타이트하지 않아 바람이 새어나오게 되어 있고 소매 끝동은 소매통보다는 좁아져 있으나 페쇄적이진 않다. 바지의 개구부는 바지통보다는 좁아지나 양복 바지에 비해 펀펀하다. 다만 겨울에는 버선을 신고 그 위에 대님으로 결박하여 폐쇄를 하나 그것은 추운 겨울에 국한하며 여름에는 개구부를 개방시킨다. 곧 개폐 양용(開閉兩用)이다.

한복 저고리는 가장 방열량이 많은 전면 개구를 하고 있으며, 전면 개구도 타이트한 결속이 아니라 옷고름으로 느슨한 결속을 함으로써 앞자락이 들추어지도록 되어 있다. 곧 방열구조를 하고 있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공존하는 기후 조건이 그같은 구조를 낳게 했을 것이다.

셋째 특징으로는 옷과 피부 사이의 공간의 크기를 들 수 있다. 방한 보온성능의 옷은 피부주변의 따스한 정지 공기층을 형성해 두어야 한다. 공기는 열전도에 있어 불량도체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 공기막을 만들어 두는 것은 체열의 냉각을 막고 또 외부의 추운 공기의 피부전달을 저하시킨다. 겨울에 옷을 겹쳐입는 이유는 곧 이 공기의 불량도체층을 많이 만드는 것이 된다.

체형이나 육선이 드러나는 옷은 북방 한랭형 의류의 특징이며, 방열을 극소화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지 섹스 어필을 위해 창안된 것은 아니다.

이 북방형의 타이트한 옷에 비해 한복의 바지•저고리•치마는 그 북방형 옷의 남한계에 속하는 옷이랄 수 있다. 피부와 옷 사이에 형성되는 공기층은 확장되어 있어, 그 대류를 허용한 느슨한 옷이 되고 만 것이다 곧 한복은 체형이나 육선이 드러나는 법없이 푼푼하고 넉넉하다.

이 역시 의복 속의 공기 대류로 방열할 필요가 있는 더운 여름철 때문에 변용된 한국적 지혜랄 것이다.

하늘을 받드는 옷

옷이라면 나는 한복을 으뜸으로 꼽는다. 한복 가운데서도 한 땀 한 땀 손으로 지은 우리 여인네들의 옷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복식이다. 많이도 쓰이는 그 저고리의 흰빛깔은 겸허와 순결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흔한 노랑이나 윤록색은 보람과 미쁨, 기쁨의 표상이다. 흰 저고리에는 검정 치마가, 그리고 노랑이나 윤록에는 당홍이 배색된다. 검정 치마는 마당을 쓸고 흙을 일구어도 무방하다는 진취의 기상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그것은 흰 저고리의 임자가 노상 섬약에 그치는 게 아님을 알리는 신호등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홍은 따뜻한 가슴을 말한다. 그런 치마를 입은 우리 딸네와 새댁네들은 언제가 시댁과 친가를 축제날로 바꾸어 놓으면서 집안과 마을, 고을을 즐겁게 만들고, 역사에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나는 우리 나라 여인네들이 옷을 짓는 데 쓰는 모든 감을 다 사람한다. 무명은 순박하면서 묵직한 느낌을 준다. 그들을 만지기만 해도 나에게는 이끼 푸른 기와와 그 너머 지천으로 휘덮인 나뭇가지들이 떠오른다. 그 사이 사이 자욱이 일어난 매미 소리도 들려 온다.

모퉁이를 돌면 들판이 있고, 거기에는 미색에 가까운 박꽃들이 유월 또는 칠월의 태양 아래 너울대고 있었다. 황소가 있는 나무 그늘, 산등성이 위에 피어나던 뭉게구름, 그 무어라 이름짓기조차 죄스러운 평화도 새삼 생각난다.

한편, 나는 선녀의 살결을 연상케 하는 명주의 사연도 안다. 뽕잎이 어른의 손바닥보다도 더 큰 넓이가 되면 누에는 마침내 집을 짓는다. 그리고 그들이 영글면 우리는 그것을 고치라고 불렀다. 어머님이나 숙모님의 손에 의해 고치는 거짓말처럼 씨가 되고 날이 되어 갔다. 그들이 짜낸 베틀 위의 그 잽싸던 손, 아니 나는 깁을 만들어 가던 날들의 밤에 그 수없이 날아다닌 반디를 기억한다. 어두운 숲이나 능선을 배경으로 맑게맑게 울린 밤새의 울음 소리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들이 짜낸 누에의 피륙을 마을 딸네나 아즈먼네들은 생명주라 불렀다. 생명주의 까슬한 기운이 잠재워지고 길들여지는 과정을 나는 안다. 그것은 가마 속에서 끓여졌고, 다시 모래밭에서 햇볕을 받으며 펼쳐져야 했다. 나는 그들의 표백 장소가 된 맑은 물가의 백사장을 안다. 그것은 소월(素月)이 부른 노래 강변과 너무도 혹사(酷似)한 곳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삼베의 굽힘 없는 결과 그것을 짜내기까지의 이야기도 적어 낼 수 있다. 텃밭에 복숭아가 익을 무렵이면 밋밋한 몸집을 가진 삼대는 어른들의 키를 넉넉히 넘겼다. 그것을 일꾼들이 베어 내기 시작하면 안동포 제작의 막이 열리게 된다. 산더미처럼 쌓인 삼단을 흙으로 덮은 다음, 돌구들 밑으로 장작을 지피면 안개처럼 몽몽하게 피던 김들의 극성, 그 무렵 나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한갓 푸나무의 껍질이 실이 되고 피륙이 되는 일은 아무리 지켜 보아도 지루하지가 않은 요술의 극치에 속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아끼고 싶은 것은 우리 여인네들의 재래식 의상, 특히 그 가운데서도 저고리는 불국사나 옛 육조거리 전면에 자리잡고 있는 광화문의 추녀를 연상케 한다. 마음이 밝은 날, 그 앞에 서서 우리 고건축의 추녀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용마루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그러나 그 완만한 하강선은 추녀 끝자리에 이르러 다시 조용히 지체(肢體)를 들어 올린다. 마치, 그 위에 펼쳐진 하늘을 받들 듯 그것은 다시 거기서 얼마간 위로 굽어 휘도는 것이다. 우리 여인네들의 저고리가 바로 그런 선, 조형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라도 어머님이나 할머님이 옆에 계시거든 건성이 아닌 눈길로 그 섶을 살펴보라. 깃을 보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특징을 뚜렷이 드러내는 소매와 그 끝 부분을 검토해 보라.

어느 분이었던가, 농경 문화권에 속하는 사회를 지배해 온 슬기가 순응, 조화 의식이었다고 밝힌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서 순응 조화란, 자연에 화합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과 함수 관계를 가진다. 곡식을 가꾸고 거두는 일은 인공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분야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때 맞추어 씨를 뿌리며 가꾸고 돌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고 꽃피며 열매 맺는 일은 우리가 마음대로 촉진도 지연도 시킬 수 없다. 그를 위해서는 해와 비, 바람이라든가 땅의 자양이 주는 혜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믿고 바라면서 충실한 보조자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농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농경이란 자연을 받드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런가 하면, 자연에서 가장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하늘이다. 그리하여 하늘을 받들고 그를 향해 손을 모은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한 슬기를, 그것도 아주 중핵의 위치에서 터득해 낸 꼴이 된다. 우리 여인네들의 한복은 바로 그런 슬기를 바닥에 깔고 지어져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땅덩이 어디에 달리 우리 여인네 들의 재래식 복식과 같은 훌륭한 의상이 있을까. 그것은 고구려의 딸들이 입어 온 것이며, 신라의 뜰과 고려, 조선 왕조의 거리와 들판을 채색해 온 옷이다. 나는 우리 여인네들의 한복 입은 모양을 참으로 좋아한다.

김용직, ‘정명의 미학’ (지학사 1986)

조침문(弔針文)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未亡人) 모씨(某氏)는 두어 자(字) 글로써 침자(針字)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부녀(人間婦女)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되,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후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于今) 이십칠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靜)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총총)히 적어 영결(永訣) 하노라.

연전(年前)에 우리 시삼촌(媤三寸)께옵서 동지 상사(冬至上使) 낙점(落點)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 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親庭)과 원근 일가(遠近一家)에게 보내고 비복(婢僕)들도 쌈쌈이 낱낱이 나눠 주고, 그 중에 너를 택(擇)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되었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無數)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無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요.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身世) 박명(薄命)하여 슬하(膝下)에 한 자녀(子女) 없고, 인명(人命)이 흉완(凶頑)하여 일찍 죽지 못하고, 가산(家産)이 빈궁(貧窮)하여 침선(針線)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시름을 잊고 생애(生涯)를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늘날 너를 영결(永訣)하니, 오후 통재(嗚呼痛哉)라, 이는 귀신(鬼神)이 시기(猜忌)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鐵中)의 쟁쟁(錚錚)이라, 추호(秋豪)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의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자식(子息)이 귀(貴) 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비복(婢僕)이 순(順)하나 명(命)을 거스를 때 있나니, 너의 미묘(微妙)한 재질(才質)이 나의 전후(前後)에 수응(酬應) 함을 생각하면, 자식에게 지나고 비복(婢僕)에게 지나는지라, 천은(天銀)으로 집을 하고, 오색(五色)으로 파란을 놓아 곁고름에 채였으니, 부녀(婦女)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너로 더불어 벗이 되어, 여름 낮에 주렴(珠簾)이며, 겨울 밤에 등잔(燈盞)을 상대(相對)하여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봉미(鳳尾)를 두르는 듯, 땀땀이 떠 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相應)하고, 솔솔이 붙여 내매 조화(造化)가 무궁(無窮)하다.

이 생에 백년 동거(百年同居)하렸더니,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바늘이요, 금년 시월 초십일 술시(戌時)에, 희미한 등잔 아래서 관대(冠帶) 깃을 달다가, 무심중간(無心中間)에 자끈동 부러지니 깜짝 놀라워라. 아야 아야 바늘이여, 두 동강이 났구나.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頭골)을 깨쳐 내는 듯, 이윽도록 기색 혼절(氣塞魂絶)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이어 본들 속절없고 하릴 없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동네 장인(匠人)에게 때이련들 어찌 능(能)히 때일쏜가. 한 팔을 베어 낸 듯,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아깝다 바늘이여, 옷섶을 만져 보니, 꽂혔던 자리 없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라도,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恨)하면 누를 원(怨)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하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 지정(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 生死)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 바늘이여.

출처: 유씨 부인, 우리 시대의 한국 문학(고전 수필) 계몽사, 1994

규중 칠우 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이른바 규중 칠우(閨中七友)는 부인네 방 가운데 일곱 벗이니 글하는 선배는 필묵(筆墨)과 종이, 벼루로 문방 사우(文房四友)를 삼았나니, 규중 여지인들 홀로 어찌 벗이 없으리요.

이러므로 침선(針線) 돕는 유를 각각 명호(名號)를 정하여 벗을 삼으니, 바늘로 세요 각시(細腰)라 하고, 척(尺)을 척부인(尺婦人)이라 하고, 가위로 교두 각시(交頭閣氏)라 하고, 인도로 인화 부인(引火婦人)이라 하고, 달우리로 울 낭자(울娘子)라 하고, 실로 청홍흑백 각시(靑紅黑白閣氏)라 하며, 골무로 감토할미라 하여, 칠우(七友)를 삼아 규중 부인네 아침 소세를 마치매 칠위(七友ㅣ) 일제히 모여 종시(終始)하기를 한가지로 의논하여 각각 소임을 이루어 내었다.

일일(一日)은 칠우(七友) 모여 침선의 공을 의론하더니 척 부인이 긴 허리를 자히며 이르기를, “제우(諸友)는 들으라. 나는 세명지 굵은 명지 백저포(白紵布) 세승포(細升布)와 청홍녹라(靑紅綠羅) 자라(紫羅) 홍단(紅緞)을 다 내어 펼쳐 놓고 남녀의(男女衣)를 마련하니, 장단광협(長短廣狹)이며 수품 제도(手品制度)를 나 곧 아니면 어찌 이루리요. 이러므로, 의지공(衣之功)이 내 으뜸 되리라.”

교두 각시 양각(兩脚)을 빨리 놀려 내달아 이르기를,

“척 부인아, 그대 아무리 마련을 잘 한들 베어 내지 아니하면 모양 제대로 되겠느냐. 내 공과 내 덕이니 네 공만 자랑 마라.”

세요 각시 가는 허리 구붓기며 날랜 부리 두루혀 이르기를,

“양우(兩友)의 말이 불가하다. 진주(眞珠) 열 그릇이나 꿴 후에 구슬이라 할 것이니, 재단(載斷)에 능소능대(能小能大)하다 하나 나 곧 아니면 작의(作衣)를 어찌 하리요. 세누비 미누비 짧은 솔 긴 옷을 이룸이 나의 날래고 빠름이 아니면 잘게 뜨며 굵게 박아 마음대로 하리요. 척 부인 잘라 내고 교두 각시 베어 낸다 하나, 내 아니면 공이 없으려든 두 벗이 무슨 공이라 자랑하느뇨.”

청홍 각시 얼굴이 붉으락부르락하여 노하여 말하기를,

“세요야, 네 공이 내 공이라. 자랑 마라. 네 아무리 착한 체하나 한 솔 반 솔인들 내 아니면 네 어찌 성공하리요.”

감토 할미 웃고 이르기를,

“각시님네, 웬만히 자랑 마소. 이 늙은이 수말(首末) 작지만 아가씨네 손부리 아프지 아니하게 바느질 도아 드리나니, 옛말이 이르기를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 뒤는 되지 말라 하였으니, 청홍 각시는 세요의 뒤를 따라다니며 무슨 말 하시느뇨. 실로 얼굴이 아깝구나. 나는 매양 세요의 귀에 질리었으되 낯가죽이 두꺼워 견딜 만하고 아무 말도 아니 하노라.”

인화 낭자가 이르기를,

“그대네는 다투지 말라. 나도 잠깐 공을 말하리라. 미누비, 세누비 누구로 하여 젓가락같이 고우며, 혼솔이 나 곧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이 고우리요. 침재(針才) 용속한 자가 들낙날락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의 손바닥을 한 번 씻으면 잘못한 흔적이 감추어져 세요의 공이 날로 하여 광채가 나느니라.”

울 낭자가 크나큰 입을 벌리고 너털웃음으로 이르기를,

“인화야, 너와 나는 소임 같다. 그러나 인화는 침선뿐이다. 나는 천만 가지 의복에 아니 참예하는 곳이 없고, 가증한 여자들은 하루 할 일도 열흘이나 구기어 살이 구깃구깃한 것을 나의 광둔(廣臀)으로 한번 스치면 굵은 살 낱낱이 펴이며 제도와 모양이 고와지고 더욱 하절을 만나면 소임이 다사하여 일일도 한가하지 못한지라. 의복이 나 곧 아니면 어찌 고우며 세답하는 년들이 게을러 풀먹여 널어 두고 잠만 자면 부딪쳐 말린 것을 나의 광둔 아니면 어찌 고우며, 세상 남녀 어찌 반반한 것을 입으리요. 이러므로 작의 공이 내 제일이 되느니라.”

규중 부인이 이르기를,

“칠우의 공으로 의복을 다스리나 그 공이 사람의 쓰기에 있으니 어찌 칠우의 공이라 하리요.”하고 언필(言畢)에 칠우를 밀치고 베개를 돋우고 잠을 깊이 드니 척 부인이 탄식하고 이르기를 “매정하느니 사람이요 공 모르는 것은 여자로다. 의복 마를 때는 먼저 찾고 이뤄내면 자기 공이라 하고, 게으른 종 잠깨우는 막대는 나 곧 아니면 못 칠 줄로 알고 내 허리 부러짐도 모르니 어찌 야속하고 노엽지 아니하리요.”

교두 각시 이어 말하기를,

“그대 말이 옳다. 옷 말라 벨 때는 나 아니면 못 하련마는 드느니 아니 드느니 하고 내어 던지며 양각을 각각 잡아 흔들 때는 토심적고 노엽기 어찌 측량하리요. 세요 각시 잠깐 쉬려고 달아나면 매양 내 탓만 여겨 내게 집탈하니 마치 내가 감춘 듯이 문고리에 거꾸로 달아 놓고 좌우로 고면하며 전후로 수험하여 얻어 내기 몇 번인 줄 알리요. 그 공을 모르니 어찌 애원하지 아니하리요.”

세요 각시 한숨짓고 이르기를,

“너는 커니와 내 일찍 무슨 일 사람의 손에 보채이며 요악지성(妖惡之聲)을 듣는고, 각골통한(刻骨痛恨)하며, 더욱 나의 약한 허리 휘두르며 날랜 부리 뒤치어 힘껏 침선을 돕는 줄은 모르고 마음 맞지 아니하면 나의 허리를 부러뜨려 화로에 넣으니 어찌 통원하지 아니하리요. 사람과는 극한 원수라. 같을 길없이 이따금 손톱 밑을 질러 피를 내어 설한(雪恨)하면 조금 시원하나, 간흉한 감토 할미 밀어 만류하니 더욱 애닯고 못 견디리로라.”

인화가 눈물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데아라 아야라 하는도다. 나는 무슨 죄로 포락지형(火抱烙之形)을 입어 붉은 불 가운데 낯을 지지며 굳은 것 깨치기는 나를 다 시키니 섧고 괴롭기 측량하지 못할례라.”

울 낭자가 척연하여 말하기를,

“그대와 소임(所任)이 같고 욕되기는 한가지라. 제 옷을 문지르고 멱을 잡아 들까 부르면, 우겨 누르니 황천(皇天)이 덮치는 듯 심신이 아득하여 나의 목이 따로 날 적이 몇 번이나 한 줄 알리요.”

칠우 이렇듯 담론하며 회포를 이루더니 자던 여자가 문득 깨어 칠우더러 말하기를,

“칠우는 내 허물을 그토록 하느냐.”

감토 할미 고두(叩頭)하고 사죄하여 말하기를,

“젊은 것들이 망령되게 생각이 없는지라 족가지 못하리로다. 저희들이 여러 죄 있으나 공이 많음을 자랑하여 원언(怨言)을 지으니 마땅히 결곤(決棍)함직하되, 평일 깊은 정과 저희 조고만 공을 생각하여 용서하심이 옳을까 하나이다.”

여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할미 말을 좇아 물시(勿施)하리니, 내 손부리 성함이 할미 공이라. 꿰어 차고 다니며 은혜를 잊지 아니하리니 금낭(錦囊)을 지어 그 가운데 넣어 몸에 지녀 서로 떠나지 아니하리라.”하니 할미는 고두배사(叩頭拜謝)하고 제붕(諸朋)은 참안(慙顔)하여 물러나니라.

출처: 작자 미상, ‘우리 시대의 한국 문학(고전 수필) 계몽사, 1994

한복의 비교 문화

한복에는 포켓이 없다. 저고리고 바지고, 밖이든 안이든 포켓이 엇다. 한복의 특색은 포켓이 없다는 데 있다.

이처럼 포켓을 거부하는 한국의 옷과 양복을 비교해 보자. 우선 양복 저고리만 해도 평균 여덟개의 포켓이 있다. 윗도리 아래 양쪽과 위쪽에 도합 세개, 아래 오른쪽 포켓 속에는 조그마한 새끼 포켓이 있어 겉만 보더라도 네 개다. 속은 윗 양쪽에 하나씩 그리고 오른쪽에 만년필꽂이 포켓과 그 아래 라이터 하나 들어갈만한 미니 포켓이 도 달려 있다.

바지에도 양쪽과 띠끈 아래에 미니 포켓이 달려 있다. 거기에다 조끼까지 입으면 겉 네 개에 속 하나가 더하고 와이셔츠 포켓까지 합치면 보통 14~15개의 포켓이 있는 셈이다.

사냥할 때 입는 사파리복이나 조종사들이 입는 조종복의 포겟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 포켓들에 지갑, 수첩, 잔돈 지갑, 각종 증명서, 명함, 자물쇠, 손수건, 담배, 라이터, 머리빗, 만년필, 볼펜, 안경, 구두주걱, 손톱깍이, 칼 등 꼴 필요한 것들을 넣고 다닌다. 거기다가 직업에 따라서 계산기, 소형 카메라 등 약간 무거운 휴대품이 늘어난다. 근대화될수록 이 휴대품은 늘어나는 추세에 있고 어쩌면 15개이 포켓으로 부족하여 앞으로의 양복에는 포켓이 더 늘어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옛날 한국은 포켓 문화가 아니라 요대 문화요, 소매 문화였다. 담뱃대나 부채는 허리춤의 띠에다가 꽂고 다닌다. 담배나 부싯돌은 주머니에 넣어 허리춤에 찬다. 관리들은 도장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땀수건은 옷소매에 넣고 다닌다. 한복의 옷 소매통은 바로 이 포켓을 거부하는 반동때문에 커진 것이다.

서양의 옷은 육체를 압박하게끔 조이는 그런 옷 문화계에 속하고 한국의 옷은 가급적 육체에 압박을 주기 않게끔 느슨하게 하는 그런 옷 문화계에 속한다. 그래서 서양의 옷은 조이는옷이요, 한국의 옷은 걸치는 옷이다.

양복 바지나 양복 스커트는 히프와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이는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바지통만은 유행에 따라 넓어졋다 좁아졌다 하나 19세기 이전의 서양 남자들 바지는 예외없이 발레리나가 입는 옷처럼 하체에 밀착되어 있는 것에 예외가 없었다. 상의도 몸에 딱맞게 지어 수많은 단추로 빈틈없이 조여놓고 있다. 거기에 목을 졸라매는 넥타이까지 연상하면 이 조이는 문화의 특성은 완연해질 것이다.

원피스나 블라우스도 외견상 조이지 않는 옷처럼 보이나 18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보이는 블라우스나 원피스의 타이트함은 육체가 터져나올 것만 같다.

양복이 몸에 타이트하게 조여입는데 비해 한복은 신체의 구조를 이용하여 그저 걸칠 뿐이다. 저고리는 어깨에 걸치는 옷이요, 걸쳐놓기만 하면 앞이 벌어지니까 옷고름으로 매어놓은 것일 뿐 옷고름이 서양의 단추나 후크나 지퍼처럼 조이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치마도 유방이라는 편리한 두 개의 육체적 돌기를 걸개로 삼아 치마말을 둘러 그 돌기의 상부에 걸쳐 맨다.

바지도 매기 좋은 허리의 구조에 걸쳐, 허리띠로 그 걸친 상태를 보강해서 입는다.

곧 옷고름이나 허리띠는 벌어지지 앟게 하고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도구일뿐 서양의 결속도구처럼 압박하고 조이는 도구는 아닌 것이다.

사람이 일을 하고 생각을 하는데 가장 쾌적한 온도가 몇 도나 되는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 그 결과를 밝히고 있다.

《기후와 문명(氣候와 文明)》이란 저술을 한 헌팅톤은 많은 자룔르 수집분석하여 육체 노동의 최적 온도는 섭씨 15℃~ 18℃요, 정신활동의 최적 온도는 그보다 한결 낮은 4℃~10℃라고 했다. 이같은 수치는 옷을 입고 있었을 때의 실내의 쾌적 온도를 나타낸 것으로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상태에서는 그 쾌적 기온이 달라진다.

맥스•루브너란 독일 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30℃라 하고, 한 일본핮자가 조사한 보로는 여름에 27.9℃요, 겨울에는 26.4℃라 했다.

루브너는 사람이 나체로 추위를 느끼는 기온은 25℃라 하고, 피부혈관의 수측 등 개인차는 있으나 보통 6.5도 내외의 체온능력을 갖고 있기에 20℃ 정도의 기온이면 나체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옷을 입고 있을 때의 외기 쾌적 온도와 우리 살갗이 느끼고 있는 쾌적 온도 사이에는 무려 15도 내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15도 내외의 온도를 조절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옷인 것이다.

외기가 일년 내내 쾌적 온도를 유지해 주는 법은 없다. 단 기온이 매일 매일 시간에 따라 변하기에 이 변화무쌍한 기온으로부터 인체를 쾌적 기온권을 유지하기 위해 옷이 있고 또 옷의 질이나 구조가 다양해진다.

옷의 기능 때문에 옷의 구조와 질은 외기의 차이에 따라 크게 변화를 일으킨다.

대체로 추운 지방의 한랭형(寒冷型) 의복과 더운 지방의 열서형(熱署型) 의복으로 대별되는데 한국처럼 겨울에는 한랭형 기후가 와서 지배하고, 여름에는 열서형 기후가 지배하는 나라에는 이 한랭형과 열서형 패턴이 약간씩 변형되어 같이 존재하며 절충•융합패턴의 옷을 형성시킨다.

열서형 의복에는 네 개의 기본형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허리에 베를 감아 늘어뜨리는 ‘요의형(腰衣型, Ioin cloth)’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스님이나 인도의 여자들이 입는 사리 같이 어깨로 베를 감아 입는 ‘가사의형(袈裟衣型)’, 베의 복판에 구멍을 뚫고 양 겨드랑이를 기우기만 하는 ‘관두의형(貫頭衣型)’, 그리고 고대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입었던 만토 또는 케이프 형태의 ‘만토형’이 그것이다.

네 가지 유형 모두가 재봉이나 바느질이 가해지지 않거나 가해져도 극히 간단히 처리한 무가공의 베나부랭이를 걸친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곧 체형에 맞게끔 복잡하게 재봉하는 한랭형 의복과는 달리 그저 장의형(長衣形)의 한 줄기 베폭이 기체(基體)가 되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몸에 감느냐에 따라 네 가지 기본 형식이 성립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로인 클로스, 곧 요의형이 한국 의상의 기본이 되고 있는 치마의 원형이 아닌가 싶다. 요의(腰衣)는 남미, 태평양제도, 오스트렐리아 북부, 동남아시아, 열대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 남부에까지 널리 분포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민족의상을 보면 남녀간에 스커트형의 것이 많다. 버마에서는 남녀간에 ‘론지이’라는 스커트형의 하의을 입는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지아 그리고 필리핀의 일부에서도 남자는 ‘사론’이라는 스커트를 입는다.

‘론지이’는 통형(筒型)으로 만들어진 스커트로, 배의 여분을 많이 남겨 오른쪽 허리로부터 왼쪽으로 휘감고 다닌다.

말레지아어로 ‘통(筒)’을 의미한다는 ‘사론’도 통형 하반신 스커트로 감고, 남은 부분을 좌우에서 접어 허리춤에 낀다는 것이 ‘론지이’와 다를 뿐 구조는 같다.

이 요의는 비록 하의라는 옷의 목적 이외에도 다목적으로 쓰이고 있다는데도 유럽풍의 스커트와 다르다.

‘사론’을 입고 그대로 물 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또 잠자리에서 시트로 쓰기도 하며, 길가나 나무 밑에 앉아서 잘 때 덮을 수 있는 홑이불도 된다. 또 볕을 가리는 차일과 커튼으로도 사용되었다.

스커트라는 점은 같으나 그 뿌리가 제각기 다른 두 개의 패턴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체형에 맞게끔 옷감을 재단해서 재봉을 한 한랭형(寒冷型), 재봉 등의 가공없이 허리에 둘러 드리우는 열서형(熱署型) 스커트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한복의 치마는 한랭형인가? 열서형인가? 순수한 열서형은 아닐지라도 그 구조나 입는 방법이 요의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 원조는 열서형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첫째, 치마말 부분이 약간 가공되어 있으나 치마를 벗어 놓으면 한 장의 옷감이라는 평면성이 요의와 같다.

둘째, 허리에 둘러맨다는 구조나 입는 방법이 요의와 같다. 남방의 요의에 비해 치마말과 치마끈이 달라졌을 뿐 그 입는 방법과 구조는 같다.

셋째, 한랭형의 스커트는 체형에 맞추어 바느질을 하는데 비해 한국의 치마는 요의처럼 하체를 감아 그 끝을 들고 다니거나 허리춤에 꽂는다. 곧 한랭형 스커트는 옷 속에 몸을 담는데 비해 우리의 치마는 몸에 옷을 감는다는 차이에서 요의형에 가깝다.

넷째, 치마는 옷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요의처럼 다목적으로 이용한다. 아이를 감싸 안을 때 포대기가 되고, 추운 바람이 불 때 둘러씀으로써 방풍복이 되기도 한다. 또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 쓰개치마가 되고,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흐를 때면 수건이 되며, 그릇을 닦을 때는 행주가되기도 한다.

또 치마끝을 붙들고 춤을 추면 무의(舞衣)가 되고 곡물을 담아 들고 오면 바구니도 된다. 한랭형 스커트가 전혀 이같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 치마의 뿌리는 요의랄 수 있다.

다섯째, 치마는 주로 남쪽에서 입었고 북쪽에서는 여자도 바지를 주로 입었다는 역사적 분포로 미루어 봐도 치마가 남방문화의 영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치마는 남방계 의문화의 북한계적인 형태로 봐야할 것이며 문화전파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날씨가 추운 지방에 있어 옷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능한 몸의 피부면이 바깥 공기나 바람에 직접 닿지 않게 감싸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에서 발산되는 열을 100%라 하면 피부를 통해 발산되는 양이 80% 내외이고, 폐에서 기관지를 통해 발산되는 분량이 20% 내외, 그리고 소화기에서 배설물을 통해 발산되는 분량이 2%내외라 한다. 곧 체령의 거의가 피부를 통해 발산되기에 이 체열발산을 방어하는 방법으로 의복이 발달한 것이다.

아주 추운 북극 에스키모인들의 옷은 얼굴만 노출하게 되어 있다. 얼굴은 전 피부 면적의 3.1~3.3%에 불과하다 한다. 비교적 고위도에 속하는 추눈 서구에서 만들어진 세비로는 목의 절반 이상과 손목 이하만 노출되고 있다. 이 얼굴과 손목 이하의 노출 면적은 전 면적으 15%이며 추운 계절에는 장갑을 끼고 모자를 씀으로써 노출 면적을 2%이하로 줄이고 있다.

이에 비하면 한복의 저고리는 세비로나 청복(淸服)에 비해 목의 중간 하반부와 가슴팍에 노출부분이 더 가산된다. 여기에 소매 밑부분의 노출까지 보태면 한복의 피부 노출 면적은 20~22%쯤 된다. 곧 양복보다 5~7%가 넓다.

즉 옷에 있어 피부면적의 노출은 이처럼 북위도가 높아짐에 따라 반비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한복 저고리의 동정부분의 구조는 이 한국적 풍토에 서 합리적임을 알 수 잇다.

두 번째, 옷의 개구부(開口部)의 크기와 그 개구부의 처리 여하로 한랭형 의류의 특징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의복의 내부에 있는 공기층의 대류(對流)로서 환기가 베풀어지고 있기에 곧 목, 소매, 바짓가랑이 등 개구부가 작을수록 보온성이 커진다.

에스키모의 옷은 상의와 머리를 덮고 있는 후드가 연결되어 목부분의 개구부로부터의 체열방출을 최대한으로 막고 있다. 양복에서 와이셔츠의 컬러를 세우고 넥타이로 죄어매는 것도 이 상향 개구부의 폐쇄를 의미한다.

청니들의 옷소매는 드리우면 손등이 가려질 만큼 길고 항상 두 손을 반대편 옷소매에 끼고 다님으로써 하향 개구부를 폐쇄하는 것이 옷입는 습관이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한복의 하향 개구부는 비교적 개방적이다.

저고리 하단의 개구부도 타이트하지 않아 바람이 새어나오게 되어 있고 소매 끝동은 소매통보다는 좁아져 있으나 페쇄적이진 않다. 바지의 개구부는 바지통보다는 좁아지나 양복 바지에 비해 펀펀하다. 다만 겨울에는 버선을 신고 그 위에 대님으로 결박하여 폐쇄를 하나 그것은 추운 겨울에 국한하며 여름에는 개구부를 개방시킨다. 곧 개폐 양용(開閉兩用)이다.

한복 저고리는 가장 방열량이 많은 전면 개구를 하고 있으며, 전면 개구도 타이트한 결속이 아니라 옷고름으로 느슨한 결속을 함으로써 앞자락이 들추어지도록 되어 있다. 곧 방열구조를 하고 있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공존하는 기후 조건이 그같은 구조를 낳게 했을 것이다.

셋째 특징으로는 옷과 피부 사이의 공간의 크기를 들 수 있다. 방한 보온성능의 옷은 피부주변의 따스한 정지 공기층을 형성해 두어야 한다. 공기는 열전도에 있어 불량도체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 공기막을 만들어 두는 것은 체열의 냉각을 막고 또 외부의 추운 공기의 피부전달을 저하시킨다. 겨울에 옷을 겹쳐입는 이유는 곧 이 공기의 불량도체층을 많이 만드는 것이 된다.

체형이나 육선이 드러나는 옷은 북방 한랭형 의류의 특징이며, 방열을 극소화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지 섹스 어필을 위해 창안된 것은 아니다.

이 북방형의 타이트한 옷에 비해 한복의 바지•저고리•치마는 그 북방형 옷의 남한계에 속하는 옷이랄 수 있다. 피부와 옷 사이에 형성되는 공기층은 확장되어 있어, 그 대류를 허용한 느슨한 옷이 되고 만 것이다 곧 한복은 체형이나 육선이 드러나는 법없이 푼푼하고 넉넉하다.

이 역시 의복 속의 공기 대류로 방열할 필요가 있는 더운 여름철 때문에 변용된 한국적 지혜랄 것이다.

하늘을 받드는 옷

옷이라면 나는 한복을 으뜸으로 꼽는다. 한복 가운데서도 한 땀 한 땀 손으로 지은 우리 여인네들의 옷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복식이다. 많이도 쓰이는 그 저고리의 흰빛깔은 겸허와 순결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흔한 노랑이나 윤록색은 보람과 미쁨, 기쁨의 표상이다. 흰 저고리에는 검정 치마가, 그리고 노랑이나 윤록에는 당홍이 배색된다. 검정 치마는 마당을 쓸고 흙을 일구어도 무방하다는 진취의 기상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그것은 흰 저고리의 임자가 노상 섬약에 그치는 게 아님을 알리는 신호등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홍은 따뜻한 가슴을 말한다. 그런 치마를 입은 우리 딸네와 새댁네들은 언제가 시댁과 친가를 축제날로 바꾸어 놓으면서 집안과 마을, 고을을 즐겁게 만들고, 역사에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나는 우리 나라 여인네들이 옷을 짓는 데 쓰는 모든 감을 다 사람한다. 무명은 순박하면서 묵직한 느낌을 준다. 그들을 만지기만 해도 나에게는 이끼 푸른 기와와 그 너머 지천으로 휘덮인 나뭇가지들이 떠오른다. 그 사이 사이 자욱이 일어난 매미 소리도 들려 온다.

모퉁이를 돌면 들판이 있고, 거기에는 미색에 가까운 박꽃들이 유월 또는 칠월의 태양 아래 너울대고 있었다. 황소가 있는 나무 그늘, 산등성이 위에 피어나던 뭉게구름, 그 무어라 이름짓기조차 죄스러운 평화도 새삼 생각난다.

한편, 나는 선녀의 살결을 연상케 하는 명주의 사연도 안다. 뽕잎이 어른의 손바닥보다도 더 큰 넓이가 되면 누에는 마침내 집을 짓는다. 그리고 그들이 영글면 우리는 그것을 고치라고 불렀다. 어머님이나 숙모님의 손에 의해 고치는 거짓말처럼 씨가 되고 날이 되어 갔다. 그들이 짜낸 베틀 위의 그 잽싸던 손, 아니 나는 깁을 만들어 가던 날들의 밤에 그 수없이 날아다닌 반디를 기억한다. 어두운 숲이나 능선을 배경으로 맑게맑게 울린 밤새의 울음 소리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들이 짜낸 누에의 피륙을 마을 딸네나 아즈먼네들은 생명주라 불렀다. 생명주의 까슬한 기운이 잠재워지고 길들여지는 과정을 나는 안다. 그것은 가마 속에서 끓여졌고, 다시 모래밭에서 햇볕을 받으며 펼쳐져야 했다. 나는 그들의 표백 장소가 된 맑은 물가의 백사장을 안다. 그것은 소월(素月)이 부른 노래 강변과 너무도 혹사(酷似)한 곳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삼베의 굽힘 없는 결과 그것을 짜내기까지의 이야기도 적어 낼 수 있다. 텃밭에 복숭아가 익을 무렵이면 밋밋한 몸집을 가진 삼대는 어른들의 키를 넉넉히 넘겼다. 그것을 일꾼들이 베어 내기 시작하면 안동포 제작의 막이 열리게 된다. 산더미처럼 쌓인 삼단을 흙으로 덮은 다음, 돌구들 밑으로 장작을 지피면 안개처럼 몽몽하게 피던 김들의 극성, 그 무렵 나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한갓 푸나무의 껍질이 실이 되고 피륙이 되는 일은 아무리 지켜 보아도 지루하지가 않은 요술의 극치에 속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아끼고 싶은 것은 우리 여인네들의 재래식 의상, 특히 그 가운데서도 저고리는 불국사나 옛 육조거리 전면에 자리잡고 있는 광화문의 추녀를 연상케 한다. 마음이 밝은 날, 그 앞에 서서 우리 고건축의 추녀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용마루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그러나 그 완만한 하강선은 추녀 끝자리에 이르러 다시 조용히 지체(肢體)를 들어 올린다. 마치, 그 위에 펼쳐진 하늘을 받들 듯 그것은 다시 거기서 얼마간 위로 굽어 휘도는 것이다. 우리 여인네들의 저고리가 바로 그런 선, 조형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라도 어머님이나 할머님이 옆에 계시거든 건성이 아닌 눈길로 그 섶을 살펴보라. 깃을 보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특징을 뚜렷이 드러내는 소매와 그 끝 부분을 검토해 보라.

어느 분이었던가, 농경 문화권에 속하는 사회를 지배해 온 슬기가 순응, 조화 의식이었다고 밝힌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서 순응 조화란, 자연에 화합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과 함수 관계를 가진다. 곡식을 가꾸고 거두는 일은 인공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분야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때 맞추어 씨를 뿌리며 가꾸고 돌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고 꽃피며 열매 맺는 일은 우리가 마음대로 촉진도 지연도 시킬 수 없다. 그를 위해서는 해와 비, 바람이라든가 땅의 자양이 주는 혜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믿고 바라면서 충실한 보조자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농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농경이란 자연을 받드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런가 하면, 자연에서 가장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하늘이다. 그리하여 하늘을 받들고 그를 향해 손을 모은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한 슬기를, 그것도 아주 중핵의 위치에서 터득해 낸 꼴이 된다. 우리 여인네들의 한복은 바로 그런 슬기를 바닥에 깔고 지어져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땅덩이 어디에 달리 우리 여인네 들의 재래식 복식과 같은 훌륭한 의상이 있을까. 그것은 고구려의 딸들이 입어 온 것이며, 신라의 뜰과 고려, 조선 왕조의 거리와 들판을 채색해 온 옷이다. 나는 우리 여인네들의 한복 입은 모양을 참으로 좋아한다.

김용직, ‘정명의 미학’ (지학사 1986)

조침문(弔針文)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未亡人) 모씨(某氏)는 두어 자(字) 글로써 침자(針字)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부녀(人間婦女)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되,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후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于今) 이십칠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靜)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총총)히 적어 영결(永訣) 하노라.

연전(年前)에 우리 시삼촌(媤三寸)께옵서 동지 상사(冬至上使) 낙점(落點)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 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親庭)과 원근 일가(遠近一家)에게 보내고 비복(婢僕)들도 쌈쌈이 낱낱이 나눠 주고, 그 중에 너를 택(擇)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되었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無數)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無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요.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身世) 박명(薄命)하여 슬하(膝下)에 한 자녀(子女) 없고, 인명(人命)이 흉완(凶頑)하여 일찍 죽지 못하고, 가산(家産)이 빈궁(貧窮)하여 침선(針線)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시름을 잊고 생애(生涯)를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늘날 너를 영결(永訣)하니, 오후 통재(嗚呼痛哉)라, 이는 귀신(鬼神)이 시기(猜忌)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鐵中)의 쟁쟁(錚錚)이라, 추호(秋豪)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의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자식(子息)이 귀(貴) 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비복(婢僕)이 순(順)하나 명(命)을 거스를 때 있나니, 너의 미묘(微妙)한 재질(才質)이 나의 전후(前後)에 수응(酬應) 함을 생각하면, 자식에게 지나고 비복(婢僕)에게 지나는지라, 천은(天銀)으로 집을 하고, 오색(五色)으로 파란을 놓아 곁고름에 채였으니, 부녀(婦女)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너로 더불어 벗이 되어, 여름 낮에 주렴(珠簾)이며, 겨울 밤에 등잔(燈盞)을 상대(相對)하여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봉미(鳳尾)를 두르는 듯, 땀땀이 떠 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相應)하고, 솔솔이 붙여 내매 조화(造化)가 무궁(無窮)하다.

이 생에 백년 동거(百年同居)하렸더니,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바늘이요, 금년 시월 초십일 술시(戌時)에, 희미한 등잔 아래서 관대(冠帶) 깃을 달다가, 무심중간(無心中間)에 자끈동 부러지니 깜짝 놀라워라. 아야 아야 바늘이여, 두 동강이 났구나.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頭골)을 깨쳐 내는 듯, 이윽도록 기색 혼절(氣塞魂絶)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이어 본들 속절없고 하릴 없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동네 장인(匠人)에게 때이련들 어찌 능(能)히 때일쏜가. 한 팔을 베어 낸 듯,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아깝다 바늘이여, 옷섶을 만져 보니, 꽂혔던 자리 없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라도,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恨)하면 누를 원(怨)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하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 지정(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 生死)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 바늘이여.

출처: 유씨 부인, 우리 시대의 한국 문학(고전 수필) 계몽사, 1994

규중 칠우 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이른바 규중 칠우(閨中七友)는 부인네 방 가운데 일곱 벗이니 글하는 선배는 필묵(筆墨)과 종이, 벼루로 문방 사우(文房四友)를 삼았나니, 규중 여지인들 홀로 어찌 벗이 없으리요.

이러므로 침선(針線) 돕는 유를 각각 명호(名號)를 정하여 벗을 삼으니, 바늘로 세요 각시(細腰)라 하고, 척(尺)을 척부인(尺婦人)이라 하고, 가위로 교두 각시(交頭閣氏)라 하고, 인도로 인화 부인(引火婦人)이라 하고, 달우리로 울 낭자(울娘子)라 하고, 실로 청홍흑백 각시(靑紅黑白閣氏)라 하며, 골무로 감토할미라 하여, 칠우(七友)를 삼아 규중 부인네 아침 소세를 마치매 칠위(七友ㅣ) 일제히 모여 종시(終始)하기를 한가지로 의논하여 각각 소임을 이루어 내었다.

일일(一日)은 칠우(七友) 모여 침선의 공을 의론하더니 척 부인이 긴 허리를 자히며 이르기를, “제우(諸友)는 들으라. 나는 세명지 굵은 명지 백저포(白紵布) 세승포(細升布)와 청홍녹라(靑紅綠羅) 자라(紫羅) 홍단(紅緞)을 다 내어 펼쳐 놓고 남녀의(男女衣)를 마련하니, 장단광협(長短廣狹)이며 수품 제도(手品制度)를 나 곧 아니면 어찌 이루리요. 이러므로, 의지공(衣之功)이 내 으뜸 되리라.”

교두 각시 양각(兩脚)을 빨리 놀려 내달아 이르기를,

“척 부인아, 그대 아무리 마련을 잘 한들 베어 내지 아니하면 모양 제대로 되겠느냐. 내 공과 내 덕이니 네 공만 자랑 마라.”

세요 각시 가는 허리 구붓기며 날랜 부리 두루혀 이르기를,

“양우(兩友)의 말이 불가하다. 진주(眞珠) 열 그릇이나 꿴 후에 구슬이라 할 것이니, 재단(載斷)에 능소능대(能小能大)하다 하나 나 곧 아니면 작의(作衣)를 어찌 하리요. 세누비 미누비 짧은 솔 긴 옷을 이룸이 나의 날래고 빠름이 아니면 잘게 뜨며 굵게 박아 마음대로 하리요. 척 부인 잘라 내고 교두 각시 베어 낸다 하나, 내 아니면 공이 없으려든 두 벗이 무슨 공이라 자랑하느뇨.”

청홍 각시 얼굴이 붉으락부르락하여 노하여 말하기를,

“세요야, 네 공이 내 공이라. 자랑 마라. 네 아무리 착한 체하나 한 솔 반 솔인들 내 아니면 네 어찌 성공하리요.”

감토 할미 웃고 이르기를,

“각시님네, 웬만히 자랑 마소. 이 늙은이 수말(首末) 작지만 아가씨네 손부리 아프지 아니하게 바느질 도아 드리나니, 옛말이 이르기를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 뒤는 되지 말라 하였으니, 청홍 각시는 세요의 뒤를 따라다니며 무슨 말 하시느뇨. 실로 얼굴이 아깝구나. 나는 매양 세요의 귀에 질리었으되 낯가죽이 두꺼워 견딜 만하고 아무 말도 아니 하노라.”

인화 낭자가 이르기를,

“그대네는 다투지 말라. 나도 잠깐 공을 말하리라. 미누비, 세누비 누구로 하여 젓가락같이 고우며, 혼솔이 나 곧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이 고우리요. 침재(針才) 용속한 자가 들낙날락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의 손바닥을 한 번 씻으면 잘못한 흔적이 감추어져 세요의 공이 날로 하여 광채가 나느니라.”

울 낭자가 크나큰 입을 벌리고 너털웃음으로 이르기를,

“인화야, 너와 나는 소임 같다. 그러나 인화는 침선뿐이다. 나는 천만 가지 의복에 아니 참예하는 곳이 없고, 가증한 여자들은 하루 할 일도 열흘이나 구기어 살이 구깃구깃한 것을 나의 광둔(廣臀)으로 한번 스치면 굵은 살 낱낱이 펴이며 제도와 모양이 고와지고 더욱 하절을 만나면 소임이 다사하여 일일도 한가하지 못한지라. 의복이 나 곧 아니면 어찌 고우며 세답하는 년들이 게을러 풀먹여 널어 두고 잠만 자면 부딪쳐 말린 것을 나의 광둔 아니면 어찌 고우며, 세상 남녀 어찌 반반한 것을 입으리요. 이러므로 작의 공이 내 제일이 되느니라.”

규중 부인이 이르기를,

“칠우의 공으로 의복을 다스리나 그 공이 사람의 쓰기에 있으니 어찌 칠우의 공이라 하리요.”하고 언필(言畢)에 칠우를 밀치고 베개를 돋우고 잠을 깊이 드니 척 부인이 탄식하고 이르기를 “매정하느니 사람이요 공 모르는 것은 여자로다. 의복 마를 때는 먼저 찾고 이뤄내면 자기 공이라 하고, 게으른 종 잠깨우는 막대는 나 곧 아니면 못 칠 줄로 알고 내 허리 부러짐도 모르니 어찌 야속하고 노엽지 아니하리요.”

교두 각시 이어 말하기를,

“그대 말이 옳다. 옷 말라 벨 때는 나 아니면 못 하련마는 드느니 아니 드느니 하고 내어 던지며 양각을 각각 잡아 흔들 때는 토심적고 노엽기 어찌 측량하리요. 세요 각시 잠깐 쉬려고 달아나면 매양 내 탓만 여겨 내게 집탈하니 마치 내가 감춘 듯이 문고리에 거꾸로 달아 놓고 좌우로 고면하며 전후로 수험하여 얻어 내기 몇 번인 줄 알리요. 그 공을 모르니 어찌 애원하지 아니하리요.”

세요 각시 한숨짓고 이르기를,

“너는 커니와 내 일찍 무슨 일 사람의 손에 보채이며 요악지성(妖惡之聲)을 듣는고, 각골통한(刻骨痛恨)하며, 더욱 나의 약한 허리 휘두르며 날랜 부리 뒤치어 힘껏 침선을 돕는 줄은 모르고 마음 맞지 아니하면 나의 허리를 부러뜨려 화로에 넣으니 어찌 통원하지 아니하리요. 사람과는 극한 원수라. 같을 길없이 이따금 손톱 밑을 질러 피를 내어 설한(雪恨)하면 조금 시원하나, 간흉한 감토 할미 밀어 만류하니 더욱 애닯고 못 견디리로라.”

인화가 눈물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데아라 아야라 하는도다. 나는 무슨 죄로 포락지형(火抱烙之形)을 입어 붉은 불 가운데 낯을 지지며 굳은 것 깨치기는 나를 다 시키니 섧고 괴롭기 측량하지 못할례라.”

울 낭자가 척연하여 말하기를,

“그대와 소임(所任)이 같고 욕되기는 한가지라. 제 옷을 문지르고 멱을 잡아 들까 부르면, 우겨 누르니 황천(皇天)이 덮치는 듯 심신이 아득하여 나의 목이 따로 날 적이 몇 번이나 한 줄 알리요.”

칠우 이렇듯 담론하며 회포를 이루더니 자던 여자가 문득 깨어 칠우더러 말하기를,

“칠우는 내 허물을 그토록 하느냐.”

감토 할미 고두(叩頭)하고 사죄하여 말하기를,

“젊은 것들이 망령되게 생각이 없는지라 족가지 못하리로다. 저희들이 여러 죄 있으나 공이 많음을 자랑하여 원언(怨言)을 지으니 마땅히 결곤(決棍)함직하되, 평일 깊은 정과 저희 조고만 공을 생각하여 용서하심이 옳을까 하나이다.”

여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할미 말을 좇아 물시(勿施)하리니, 내 손부리 성함이 할미 공이라. 꿰어 차고 다니며 은혜를 잊지 아니하리니 금낭(錦囊)을 지어 그 가운데 넣어 몸에 지녀 서로 떠나지 아니하리라.”하니 할미는 고두배사(叩頭拜謝)하고 제붕(諸朋)은 참안(慙顔)하여 물러나니라.

출처: 작자 미상, ‘우리 시대의 한국 문학(고전 수필) 계몽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