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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1. 선사 시대와 고조선

선사 시대와 고조선

한반도에서는 B.C. 6000년쯤부터 빗살무늬 토기의 신석기 문화가 싹트고 있었다. 이때의 신석기인들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주로 하다 후기에는 원시 농경생활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신석기 시대는 괭이, 뒤지개, 돌보습 등의 유적으로 보아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피, 조의 유물도 발견되는데 이는 신석기 말부터였다. 이때부터 목축이 시작되었고, 개, 돼지, 물소뼈, 낚시바늘, 반두, 조개무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목축과 사냥, 어로생활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굽는 조리가 주를 이루다가 토기(土器)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목축과 사냥, 어로생활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리한 칼로 회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연기로 그을리는 조리법도 알고 있었다.

원시 조리수단은 움을 파서 그 안에다 돌을 쌓고 안에서 불을 지펴 돌과 움 안을 뜨겁게 한 다음, 열기로 익히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점차 토기로 죽을 끓여 먹게 되었고, 시루가 등장하면서 음식을 쪄 먹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나진 초도패총, 황주 침촌 유적과 무산 호곡유적 등에서는 이러한 시루가 발견되었다. 이를 볼 때 쌀을 쪄서 익힌 찐 밥, 곡물을 가루로 해서 찐 떡 등을 했을 것이다. 콩을 재배하고 돌확을 사용하던 시대에 이르면 콩을 물에 담가 불려서 갈아 끓여 콩비지 같은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빗살무늬 토기인에 이어 북방 유목민들이 청동기를 갖고 이 땅에 들어와 선주민과 어울려서 우리 민족의 원형인 맥족(貊族)이 형성되고, 이들이 고조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조선의 성립과 함께 이 땅에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 때에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목축도 발달하였으며 고기요리가 중국에 까지 알려졌다.

이때 청동기는 주로 타민족의 정복을 위한 무기가 제기(祭器)로 쓰이고 농경용구로는 쓰이지 않았다. 농경에는 여전히 돌과 나무가 사용되었고, 조, 기장, 수수, 보리, 벼, 팥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원시삼국 시대에는 밀의 유물도 발굴되었다.

맥족은 가축의 사육뿐만 아니라 가축의 조리에도 능수능란하였다. 농경을 차츰 더욱 발달하고, 가을철에 추수를 감사하는 뜻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영고(迎鼓)•동맹(東盟)•무천(舞天) 등의 제천의식을 행할 때는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춤을 추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에는 곡물을 쪄서 밥도 짓고, 떡도 만들며, 술을 빚었는데 특히 술을 빚는 기술이 뛰어나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한편 우리 조상은 중국 전래의 농작물 외에 콩을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콩의 원산지는 지금의 만주 지역으로 옛 고구려의 터이고 고구려인들은 콩을 이용하여 조리 가공법을 개발하였다. ‘시’는 콩을 발효시켜 소금을 섞은 것으로 일종의 메주인데 옛날 중국의 책에는 시의 글씨가 없고, 이는 외국말이며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씌어져 있다. 여기서 외국이라 함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콩장이 중국과 일본에 전하게 되면서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가 세계 조미료의 분포중에서 콩장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

 

  1.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삼국시대 식생활의 특징들은 농경생활이 정착되면서 확립되었다. 그 이전에는 목축•어로•수렵 등이 주된 식량 공급원의 역할을 맡았었다. 그러나 농경 생활의 정착으로 인해 이러한 식량 획득 방법은 보조수단이 되었다. 식량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지 않게 되었으니 식생활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고, 그 안정을 바탕으로 주•부식 분리의 식생활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종교가 식생활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풍미하면서 불교의 기본 계율인 살생 금지로 인하여 수렵은 물론 목축이나 생선을 잡는 것마저 금해진 때가 있었다. 이런 시기에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채소와 곡물뿐이었들 것이고, 이런 종교상의 금기(taboo)는 농경기술의 발달을 가속화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의 농경을 살펴보면 북부에 위치한 고구려는 주로 밭농사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조가 많이 생산되었다. 중남부에 위치한 신라는 보리를 백제는 밭농사와 논농사를 함께 하여 벼•기장•수수•밀•보리•콩•팥•녹두 등을 모두 재배하였다. 특히 백제는 중국 화남지방의 발전된 벼농사 기술을 도입하여 자신의 환경에 맞게 개량함으로써 삼국 중에서 벼농사가 가장 발달하였다.

집에서는 소•돼지•닭•양•염소•오리 등을 가축으로 길렀다. 3~4세기에는 배 만드는 기술이 좋아져서 큰 배를 만들어 먼 바다까지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게 되어 물고기와 해초류도 다양하게 얻게 되었다. 
채소류로는 아욱•순무•배추•무•상추•오이 등을 재배했다. 이 당시 각국가의 왕들은 나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적극적인 권농정책을 폈으며, 그 결과 관개 수리시설의 발달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와같은 농업기술의 발달은 곡식의 생산량을 높이기는 하였으나,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으로 그 양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자연히 집권층과 서민층의 식생활에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나라마다 왕족과 귀족들의 체제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들은 쌀과 갖가지 부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왕족이나 귀족과 달리 잡곡이 그들의 주식이었으며, 잡곡 중에서도 조나 보리를 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정착생활이 보편화됨으로써 주거를 위한 주택이 그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또 부엌도 집의 모퉁이에 구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점차 요리 담당자로서 여성의 역할이 커지고, 따라서 식품의 가공과 저장, 그리고 조리법도 상당히 발전되었다. 밥•떡•조미료•김치 등이 널리 이용되었고, 띄우고 삭히는 발효기술도 사용되었다.

생선 및 육류구이에 대한 조리법 역시 상당히 발달하여 ‘맥적(貊炙)’이라는 고구려 특유의 고기구이를 중국인들이 매우 선호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불고기의 유래

중국의 진(晋)나라 때는 맥적(貊炙)을 상당히 즐겨 먹었는데 귀한 손님이왔을 때나 잔치를 할 때 반드시 내놓았다. 맥이란 바로 고구려를 일컫는데 옛 고서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맥적이란 고기를 꼬챙이에 꽂아서 불 위에서 굽는 것이며 미리 조미해 둔 것’ 을 위미한다. 중국의 고기요리는 전통적으로 미리 조미하지 않고 굽거나 일부러 조미료에 무쳐 먹을 필요 없으니 무장(無醬)이라고 하였다. 모든 상황을 추려보면 맥적은 고기에다 고구려에서만 나던 부추와 마늘을 충분히 넣고 우리가 자체 개발한 장(醬)으로 조미하여 구워먹는 것으로 미리 조미한다는 점에서 불고기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음식

1. 곡물음식
벼농사를 시작하던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돌확, 절구 등이 쓰였으므로 곡물을 도정하거나 가루로 만드는 데 보다 편리했고 또한 시루가 발달하였으므로 쌀만으로 찐 밥, 쌀과 잡곡이나 콩류를 섞어서 또는 잡곡만으로 찐 떡 등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면 죽, 지진 떡, 찐 떡, 친 떡, 찐 밥 등이 구비된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는 곡물 음식이 다양화되고 특히 떡이 발달하게 된다.

2. 발효식품 가공기술의 정착
삼국시대에는 발효식품 가공기술이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발효 식품은 술, 장, 젓갈, 김치, 포 들으로 대표된다.

  • 술: 삼국시대에는 곡물 재배가 발달하였고 발효식품 가공기술이 정착되면서 술을 빚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 장: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콩이 발견되었고 술빚기와 같은 미생물을 이용하는 식품가공이 원시농경 시대에 실시되고 있었으며,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의 장 담그는 솜씨를 칭송하고 있으므로 장류가공의 상한시기도 콩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절임: 삼국시대에도 어패류, 수조육류, 채소 또는 이러한 식품을 섞어서 절인 것이 있었다. 삼국시대 절임은 소금에만 절이거나 소금과 밥이나 죽을 섞어 절인 것, 소금과 메줏가루를 섞어 절인 것 등이 있었다. 이렇듯 소금에 견딜 수 잇는 것은 모두 절였을 것이다.

 

  1. 고려시대

고려시대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들어선 고려왕조는 문화를 포함한 모든 생활면에서 신라 후기의 것을 그대로 이러 받았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이웃나라인 요(遼)•금(金•)원(元)그리고 일본 등의 침략과 나라간의 교류가 많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식생활이 다른 나라의 식문화와 다양하게 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서서히 식생활 문화가 변천과정을 겪게 되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는 고려왕조에 많은 영향을 미쳐 정치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불교적 특색이 발현되었다. 따라서 식생활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채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때는 살생 금지령과 함께 어류까지도 식용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양곡의 증산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다가 몽고의 침략 이후 살생금지령이 완화되면서 육류를 다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특기사항이라면 주막의 발생과 조미료의 발달, 기호식품의 보급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소금의 전매권이 국가에 있었고, 조리와 식품 저장법에도 새로운 변혁을 일으킨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쌀•보리•조 등은 상류층, 그리고 기장•조•수수•귀리 등이 서민들의 주식이었다. 부식으로 이용된 식품은 육류•수산물그리고 과채류 등이었다. 육류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여러 지역에 목장이 있었고, 식육으로 사용된 것은 주로 말과 소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때 만들어진 음식 중의 하나가 쇠고기를 물에 삶아 국물과 함께 먹는 설렁탕이다.

이 시대의 음식으로 이용한 육류에는 소나 말외에도 닭•돼지 등과 토끼•멧돼지 등의 야생동물이 있었고 또 서민들에게는 개가 널리 식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밖에 각종 수산물•과실류, 그리고 채소류 등이 다양하게 이용되었고, 또 식초•참깨•후추 등 향신료나 조미료가 널리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곡물 음식으로 물론 쌀밥도 있었지만 산촌에서는 보리와 피가 섞인 잡곡밥을 주로 먹었다.

『삼국유사』와『목은집(牧隱集)』에는 약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고 팥죽도 등장한다. 국수와 떡•약과•다식 등 여러가지 다양한 음식이 생기고 간장•된장•술•김치 등의 저장 음식과 두부와 콩나물도 만들어져 식품이 매우 다양해졌다.

고려의 채소음식

고려는 초기부터 개간사업을 추진하여 미곡이 증산되었는데 농지가 확장되면서 채소 재배의 용지도 확장되었다. 더욱이 고려는 승불환경 하에서 육식을 절제하였으므로 채소의 수요가 증대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등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순무, 오이, 가지, 동아, 박, 댓무, 배추, 아욱, 부추, 상추, 마늘, 파, 생강, 달래류, 토란, 순채와 같은 재배채소와 더덕, 도라지, 고비, 죽순과 각종 버섯이 있엇으며, 향신료로 산초, 귤피, 석류 등이 쓰였다. 채소 음식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쌈싸기: 쌈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음식법인데 고래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 채소음식: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뜰 안에서 잘 자라는 여섯 종류의 채소와 그것으로 만든 음식에 대해 읊고 있다. 무장아찌와 동치미, 가지 나물, 조림과 째개에서의 쓰임새, 파강회, 파전, 파장아찌, 박 나물 등 채소 음식에 대해 쓰고 있다.
  • 기타 찬물류: 밥이 주식이 되면서 반드시 반찬이 따르게 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고래로부터 전래한 장•시•포•해를 밑반찬으로 하고, 앞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채소요리를 밥반찬으로 하였다. 이외에 문헌을 보면, 토란•국•순채냉국•두부갱•다시마 요리 등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차•유밀과•다식

불교가 융성하면서 차 마시는 풍속은 극성에 이른다. 차는 상류층의 선물이 되기도 하였고 사신을 맞이하는 데도 으레 이용되었다. 차를 마시다 보니 이른바 다도(茶道)가 생겨나 고려청자 등 각종 다기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유밀과는 밀가루에 꿀을 듬뿍 섞어서 반죽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지지고 다시 꿀을 묻힌 것이다. 본디 중국에서 나온 것이나 고려에서 독특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오늘날 약과의 일종이다. 이것은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제사 때 과일 대신 사용하기 위하여 대추•밤•배•감 등의 모양으로 찍어 내었으나 나중에 새나 짐승의 모양을 만들었다.

다식은 차의 융성과 함께 발달하였다. 본디 물에 달여서 마셨다고 하는데, 송대에 가서 차 잎을 쪄서 일정한 무늬를 새긴 틀에 박아 고압으로 쪄내어 다병을 만들게 되었고, 이것을 가루로 내어 마셨다. 그러던 것이 점차 차대신 곡물에 꿀을 섞어서 반죽하여 다병을 만들듯이 다식판에 박아내어 제찬, 연회식, 음다례 등에 쓰게 되니 이름만 다식으로 남아있고 내용물은 바뀌게 되었다.

고려시대 김치의 발달

고대의 김치는 소금과 숙지게미 및 쌀죽을 섞어 절인 것으로 이것을 김치라고 하였는데, 이후로 채소재배가 발달하여 부, 미나리, 부추와 같은 신선한 채소가 많이지면서 이런 채소를 소금물에 담가 국물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김치가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알 수 있듯이 동치미가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또 널리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겨울에 대비하여 동치미를 담갔다. 동치미는 전형적인 침채형(沈菜型) 김치인데, 오늘날의 김치는 모두 침채형 김치이다.

 

  1. 조선시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기본 정책이었으나 초기 왕실에서는 불교를 옹호하였다. 따라서 조선조 초기에는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없었으나 16세기 이후 유교를 숭상하는 사림파가 양반 문벌 사회를 형성하며 식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 왕조는 토지 제도를 정비하고 농경 기술의 발달에 힘썼으며, 각종 농산물의 품종을 개량하였고, 수리 사업도 열심히 하여 식량이 많이 증산되었다. 
식생활에 유교가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우선 차를 마시는 습관이 없어진 것을 들 수 있다. 불교에서는 차를 올리고 즐겨 마셨으나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이를 꺼려하여 차밭을 방치하게 되었고, 일부 전라도 지방 사찰의 스님과 학자들 사이에만 차 마시는 풍습이 면면히 이어졌다. 결국 음차가 쇠퇴하는 반면 화채와 한약재를 달이는 탕차류의 종류가 많아지고 품질도 발달되었다.

유교의 가르침의 근본은 부모에 대한 효행이다. 부모님이 오래 사실 수 있도록 모시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여 의학을 연구하고 신선술(神仙術)을 배웠다. 우리나라 의서의 하나인 가정 백과서에는 노인에 관한 분야를 따로 마련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동양의 삼국 중에 지금은 우리나라만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는 공자 시대에 숟가락을 사용하였으므로 조선 시대의 숭유주의자들이 끝까지 숟가락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의례를 중요시하여 주자(朱子)가 가르친 가례(家禮)를 모범으로 삼아 혼례, 상례, 제례 때의 규범으로 엄격하게 지켰다.

조선 전기(前期)에는 음식이 화려하게 발전하였고, 아울러 조상에 대한 봉제사(奉祭祀)와 가족제도에 따른 식생활이 크게 중요시되던 시대였다. 농산물이나 해산물들이 더 다양해지고 각종 조미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고 조리법•가공저장법•조기기구 및 이조백자를 포함한 그릇들이 크게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들어와서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남방으로부터 고추•감자•고구마•호박•옥수수•땅콩 등이 전래된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뒤에 한반도는 임진왜란을 겪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을 전•후기로 구분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후기는 한식(韓食)의 완성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또 17세기에 들어와서 우리 식생활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고추가 전래되었다. 그러나 전쟁과 기후 이상으로 인하여 식량 사정은 대단히 어려웠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구황식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의 이동이 많아짐에 따라 각 지방의 조리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일본을 통해 건너온 고추는 여러 가지 음식의 양념으로 사용되고, 고추장을 만들고 김치에 도입되었으며, 오늘날 우리나라 음식의 특징인 매운맛과 선명한 붉은 빛깔을 내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발효 식품인 김치는 절인 채소에 고추와 채소 양념, 동물성 식품인 젓갈을 한데 하여 영양적으로도 훌륭하고, 독특한 맛으로 세계적으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그 후 19세기는 서양제국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고 천주교 탄압과 일제의 침략 등으로 국내 사정이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때 중국에서 감자가 전래되어 식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주었고, 식품 유통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면서 술집•떡집•식품 행상인 등이 거리에 등장하였다. 서민들은 술 대접하기를 즐겼다. 조선후기에는 시골의 시장에 주점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밥과 국, 그리고 김치를 기본으로 하는 한식 상차림도 이 시기에 완전히 정착되었다. 우리 식생활의 기본 격식인 상차림에서 주식과 부식이 잘 어울리게 되었다. 주식으로는 쌀밥•잡곡밥 등이, 그리고 부식으로는 채소•육류•수산물 등의 조리음식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굽고, 지지고, 졸이고, 볶고, 끓이는 등 여러 가지 조리법에 의하여 같은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맛과 형태로 만들어진 부식이 상위에 올려졌다.

주식과 부식들로 구성된 상차림은 보통 일정한 격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를 ‘반상(飯床)차림’ 또는 ‘밥상차림’이라 하였다. 이는 대개 3첩•5첩•7첩•12첩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밥•국•김치는 기본이고, 첩이 많아짐에 다라 생채•숙채•구이•조림•찜 등의 반찬이 더해진다.

이러한 다양한 상차림을 통해 영양을 섭취함으로써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근대, 현대에 이르러 외래문화의 유입과 국제 교역의 증진, 그리고 조기 가공기술의 발전과 관련기구 및 시설의 발전으로 식생활이 크게 향상되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구황식품

농경을 기본생업으로 하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수재, 한해 등의 피해로 흉년이 들면 기근이 심하였다. 이럴 때에 필요한 구휼책의 하나로 구황식품이 있었다. 구황 식품류에는 송엽, 송지, 유피, 도토리, 칡뿌리, 메밀꽃, 콩잎, 콩깍지, 토란, 마, 삽주뿌리, 콩구례, 둑대뿌리, 천문동, 백봉령, 백합, 새싹뿌리, 연근, 마름, 순무, 새삼씨, 소루쟁이, 고욤, 개앰, 들깨, 팽나무잎, 쑥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장은 우리 음식의 기본이었으니 흉년으로 곡물이 귀할 때에는 콩잎, 콩깍지 등으로 잡장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의 조미료

감미료로서 엿이 있고, 당, 조청, 흰엿이 있었다. 꿀은 고려시대에 이어 계속 많이 썼다. 꿀을 약이라 하니 밀밥은 약밥, 밀과는 약과라 하는 것과 같다. 설탕은 문헌에 나타날 뿐이나, 19세기쯤부터 수입품으로 일부 고급 음식에 조금씩 쓰이게 되었다. 소금도 많이 쓰였고 정부가 전매하였다. 곡물이나 채소의 씨를 짜낸 기름에 콩기름, 삼씨유, 평지유, 차조기유, 수박씨유, 호박씨유, 잣유, 호두유, 비자유, 참깨유, 들깨유 등이 있고 대표적인 것이 참깨유이다.

조선시대의 김치

김치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조선시대이다. 고려시대까지는 양념으로 젓갈을 넣지 않았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배추•무•오이•가지 등을 주재료로, 미나리•갓 등은 양념채소로, 파•마늘•생강•고춧가루•젓갈은 중요한 양념감이 되었다. 조선시대 김치는 전기에는 나박김치, 산갓김치, 죽순김치, 섞박지, 짠지, 신건지, 동치미, 소박이, 장아찌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김치는 재료로 초기와 같이 무, 순무, 오리, 가지가 많이 쓰이고 동아가 쓰였으며 초기에는 없던 배추, 미나리, 갓이 쓰였다. 조선시대 후기의 김치는 고추가 쓰였으며 양념으로 파, 엄차, 자총 등 여러 가지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김치가 발달하면서 겨울을 준비하기 위한 김장행사가 생겼다. 김장은 김치의 장기저장을 위한 행사이다. 저장기간으로 엄동 3개월이 필수이지만 넉넉하게 보면 늦은 가을에서 이른 봄 햇 채소가 나오는 시기까지 4~5개월이 된다.

 

  1. 현대

현대

우리나라 식생활문화사를 살펴볼 때 과거의 식생할에서도 물론 그러한 경향이 있었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은 특히 ①기호성과 개인 지향의 식생활, ②식품 위생을 고려한 안전성 지향의 식생활, ③간편선 지향의 가공식품에 의한 식생활, ④건강식품 지향의 식생활을 향유하고 있다.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특징을 식생활이란 측면에서 보면 흔히 ‘국제화 시대’, 또는 ‘외식화(外食化)시대’라 부른다. ‘국제화 시대’란 사람•물질•정보•문화 등이 나라와 지역, 그리고 구경을 넘어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생할문화 역시 이제 국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식화 시대’란 사회활동 및 생활수준 향상으로 종래 가정에서 이루어졌던 식생활의 상당부분이 가정밖으로 이동함을 의미한다.

최근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각종 단체급식소, 패밀리 레스토랑, 뷔페음식점, 패스트푸드점 등을 즐겨 이용하고 있다. 식생할의 국제화 현상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식품재료의 수출입 증대이다. 한국의 식량자급율은 겨우 25% 내외이며, 막대한 양의 식량이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서양 식문화의 전파, 최근의 외국자본에 의한 외국 식품산업의 발전, 외식점(外食店)의 급증 등은 오늘날 한국인의 식생활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빵•콜라•껌•맥주•햄버거•감자튀김•피자•햄•치즈 등등 외국 식품의 소비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식문화는 전통적으로 중국 및 일본의 식문화에 영향받은 뒤 최근 반세기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국제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한국의 식문화 역시 일본•중국•동남아•미국•유럽 등에 전파되고 있다. 김치나 불고기 등의 음식이나 한식전문점이 그 예라고 하겠으며, 전 세계에서 비빔밥이나 김밥, 김치 등의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한 새로운 음식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식생활 내용도 가정에서 직장이나 도시 상업지역 중심으로 이동하였으며, 개인화(個人化) 경향이 뚜렷하고 다양한 메뉴의 식사가 요구되고 있다. 하루 한 끼 이상을 외식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단체급식소•패스트푸드점•레스토랑•기타각종 음식점을 이용하고 있다.

이와같이 오늘날 한국의 식생활은 소득 수준의 향상, 기술의 발전, 사회여건의 변화를 바탕으로 국제화, 외식화, 다양화, 고급화, 건강•안전성지향 등으로 발전하고 있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