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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1.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신석기새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전 (BC 8000 년 경) 에 시작된다.
이 시기를 농업혁명(Agricultural Revolution) 이라 하는것은, 수렵 및 채취를 통해 식량을 조달했던 그 이전의 생활방식과는 달리, 신석기새대 이후 농업을 통해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 인류의 삶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온 까닭이다.


신석기 농업혁명으로 사람들은 유랑민에서 정착민으로 변하게 된다. 자연히 농경지 부근에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촌락에 불과했던 취락집단은, 그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도시를 형성하게 된다.

신석기인들은 땅을 파고 지붕을 씌운 움집을 만들고 그곳에 살면서 씨족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집을 지었던 이들은 불을 피우는 화덕을 갖춘 움집에서 주로 살았는데 움집은 가장 원시적인 초가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집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대부분 30cm∼1m 정도 땅을 파서 지었다. 움집의 크기는 10∼50㎡이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20㎡ 정도이다.

이들은 여러 가족이 혈연을 매개로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마을의 성격은 친족 내부의 남녀간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씨족공동체였을 것이다. 이들 씨족공동체는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노동하며, 그로써 얻은 생산물을 공동분배하는 평등사회였다. 하나의 씨족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곧 그와 족외혼을 하던 다른 씨족들이 근처에 더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사이에는 혼인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교환 등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일정한 교류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해안가에 거주하던 신석기인들은 어로활동의 결과물로 패총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사람들은 기원전 3000~2000년 무렵에 야생동식물의 채집에 의존해 온 생활형태에서 벗어나 가축을 기르고 경작과 재배를 통해 곡식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주거지도 구릉지대로 옮겼는데, 후기 빗살무늬토기의 바닥이 평평해지는 것은 이러한 변화에 수반된 것으로 생각된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해안과 강변에 거주했던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점차 내륙지방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원형 또는 방형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웅기(雄基)의 패총 움집에서는 오늘날의 화덕과 같은 난방장치도 발견되었다.

한편 1983년 5월에는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平海邑) 후포리(厚浦里)에서 BC 10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황갈색 점토층에 인골(人骨)과 더불어 돌도끼가 널려 있는 한국 최초의 신석기시대 매장시설(埋葬施設)이다. 그 양식은 돌도끼를 무수히 깔고 그 위에 세골(洗骨)한 것으로 보이는 인골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3∼4층위를 이루고 있다. 이제까지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이 주거지(住居址)였는데 매장형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특히 돌도끼의 모양이 종래의 민무늬토기시대의 것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띠며 인골과 돌널(石槨)이 그대로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묘제(墓制)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낮은 언덕에 새로운 삶의 터를 잡고 더욱더 활발해진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다.
한곳에 여러 채의 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아 사화규모가 이전보다 더욱 확대된 것을 알수 있다.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기 시작한 이 시기는 청동기를 소유한 집단이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는 시기다.

한국의 청동기시대가 확인된 것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였는데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과 유적지인 민무늬토기 · 간석기 · 고인돌 등을 통해서 볼 때, 세부적으로는 다양성을 지니면서 전체적으로는 동질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던 시대였음이 밝혀졌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강가의 언덕이나 내륙의 구릉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신석기시대에 비해 집을 지었던 구덩이의 깊이는 얕아지고 규모는 약간 더 커진다.

움의 형태는 네모진 것이 많으나 서남부지방에서는 둥근 형태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움집의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나 지름이 4~7m 정도이며 내부에는 냇돌을 돌리거나 구덩이를 약간 파서 만든 화덕자리(爐址)가 있다. 큰 집터에는 화덕자리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주거형식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움집과 청동기시대 움집을 살펴보면, 대개 움집의 위치, 화덕의 위치, 규모, 움집 모양새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우선 신석기시대 움집은 강가나 해안가에 주로 위치하고, 움집의 모양은 원형이나 모가 둥근 방형이다. 그리고 화덕은 움집 정중앙에 위치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로 가면서 움집은 주로 구릉지대로 옮겨지고 집단취락 형태로 조성되며, 규모도 커짐과 동시에 움집 모양 역시 직사각형으로 바뀐다. 그리고 화덕은 중앙에서 구석으로 옮겨지고, 여러 가지 물건을 별도로 두는 창고시설 등이 따로 만들어진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집 내에 화덕과 저장 구덩이만 만들었고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방은 1개에서 2개뿐이었다. 청동기로 접어들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생활의 규모가 커지자 같은 지역의 집터라 하더라도 그 넓이가 다양하여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의식 장소 등으로 분화해 감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말기에 이르게 되면 움집이 지상 가옥화되어 땅을 파지 않고 집을 짓고 살았다.

  1. 삼국시대

삼국시대

삼국시대 들어서면 땅위에서 얼마간의 깊이로 움을 파서 그 위에 지붕을 덮어 만든 수혈주거로부터 땅위에 집적 집을 짓는 지상주거로 집의 형태가 바뀐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통해 삼한(三韓)시대에 이미 완전한 목조건축 양식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할수 있고, 이를 만들었을 도구들이 청동기시대 유구 가운데 출토되고 있으며 당시 완전한 목조 주택의 유형을 보여 주고 있는 유물로서 기원후 5세기 것으로 추청되는 가형토기(家形土基) 가 나타난다 .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문화의 중흥을 이룩한 고구려는 가장 먼저 양식화된 목조건축 양식을 완성했다.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며 촉과 홈 그리고 장부를 가공했을 만한 청동기 시대 목재를 가공했을 공구류(끌, 대패날, 자귀)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분벽화를 보면 왕궁(王宮), 관부(官府), 사원 등을 지을 때 이미 기와를 얹었고, 민가는 초옥(草屋)으로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 주거형식의 가장 기본이 되는 온돌구법은 이미 고구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이르면서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발달한 고구려의 양식은 백제에 전수되고, 이것이 백제 고유의 문화와 융합하여 양식으로서 완성되었으며, 이러한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백제의 일반주택은 유구(遺構 건축 구조를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유물)통해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계 불감을 보면 하앙식 구조의 목조건축이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인 신라의 경우, 일반적인 건축 양식은 두 나라와 같은 것이었으나, 당(唐)나라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가미되면서 더욱 화려한 양식으로 발전하였고, 계급에 따른 주택의 규모를 법으로 제한할 정도로 건축문화가 성숙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골품제도(骨品制度)에 의한 신분 및 자격에 따라 건물의 규모 , 기단(基壇) , 두공(枓) , 대문형식 및 장벽(牆壁) 높이, 그리고 실내장식의 정도까지를 규제하였고 이는 삼국사기 옥사조에 기록되었다.

  1. 고려 시대

고려 시대

교려시대의 건축은 신라의 것을 계승하여 보다 풍요로운 주택문화를 누렸다.
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귀족계급과 서민계급 간 주택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인 것으로 짐작된다.

Example of a house from Koryo Dynasty Era
Interior of Koryo Dynasty House 

고려시대 귀족계급들은 침대와 의자를 사용하였으며, 다양한 가구와 고급품으로 치장한 호화로운 입식 중심의 주거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민가(民家)에서는 주로 부분 온돌인 쪽구들 형태였고 흙바닥에 자리를 깔아 생활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유한 민가는 기와를 이어 지붕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풀이나 짚을 사용했고 좌식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때 널리 유행했던 건축양식은 주심포계이며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그리고 봉정사 극락전과, 강릉객사문, 수덕사 대웅전 등이 그것이다. 장려 웅대한 다포계 양식은 말기에 나타난다.

화려함과 웅장함을 지닌 고려시대 조선 초기 경복궁 창건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1. 조선시대  실제와 격식

조선시대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이 그대로 전승되었으나, 차차 다포계와 익공양식 그리고 도리집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귀족계급과 서민계급 간 주택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인 것으로 짐작된다.

대문 · 노비숙소 · 창고인 행랑채와 행랑마당과 주로 남자 주인의 거처로 쓰이는 사랑채와 사랑마당, 그리고 여자들과 유아들의 점유공간인 안채와 안마당이 그것이다. 이 세 영역의 공간구획은 점차 강한 폐쇄성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주택을 지을 때는, 북쪽에 산을 등지고 남쪽이 넓게 터져 있으며 왼쪽으로부터 앞쪽을 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곳을 택하였는데, 주거의 중요부분을 남향과 동남향으로 배치하는 것을 가장 좋게 여겼다. 구조는 일반적으로 석축기단(石築基壇) 위에 목구조로 세우며, 지붕은 주로 합각지붕을 이루고, 행랑채와 일부 부속건물은 맞배지붕 또는 우진각 지붕 등으로 이었다.

조선 전기부터 가사규제(家舍規制)가 계속되어 신분계급에 따른 주택 규모와 형식이 제한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해져 궁전의 침전건축(寢殿建築)을 모방하거나 서민들도 상류주택을 모방하였다.

Example of a Joseon Dynasty Era house

자연과 풍토에 보다 긴박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던 민가는 간략한 목구조와 초가로 이루어지는 형식이 많았으며, 지역별 특성에 따라 각기 그 유형을 달리한다. 함경형(咸鏡型)과 서북형(西北型), 중부형과 서울형, 그리고 남부형으로 구분되는 민가의 유형들은, 북부지역이 주로 田형의 평면으로 정주간이 특색인데 비해, 중부지역은 ㄱ자형에 대청이 중심을 이루고, 남부지역은 一자형에 마루와 툇마루를 갖추어 중 · 북부보다 개방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대체로 3∼5칸의 규모로서 큰 작업공간과 부속건물들을 갖추고 있었다.

  1. 조선말기

조선말기 개항(開港) 을 통하여 외국문물이 상륙함으로 주택양식에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부산, 원산, 인천을 비롯한 개항장에는 각국의 거주지가 설정되고, 가국의 양식대로 가옥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서구양식이 직접적으로 전래된 예는 벌로 많지 않았고, 대부분 일본을 통해 여과된 양식주거(洋式住居)가 일본식 주거와 결합하였으며 특히 권국피탈 이후에는 일본의 목조양식 자체가 수입되었다.

일본인들은 초기에는 조선의 가옥이나 목조양관(木造洋館)에 거주하였으나, 그 후 풍토에 맞게 온돌 난방장치를 하거나 벽을 두껍게 하고 창호면적을 줄이는 등 가옥을 변형하였다.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많은 관사건물이 건축되었는데, 이들은 양식의 접객부분을 채용하고, 다다미방과 온돌방에 양풍의 개폐창을 사용하여 서양풍의 외관을 하는 등 여러 양식을 절충한 양상을 보였다. 또한 일양절충식(日洋折衷式) 주택의 영향으로 한국에도 콘크리트 · 벽돌 · 블록 등의 재료와 아스팔트 방수와 페치카 난방 등의 기술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들은 재래식 주택의 본질적 개선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한편, 주택공사업자들에 의해서 재래식 주택이 양산되었으나, 공사비의 절감과 구조의 간편화라는 요구로 인해 이러한 양식은 전통적인 주택도 아니고 기능적으로 우수한 서양식도 아닌, 구조와 세부적 변화에 그친 것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 차차 중류계급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 일양절충식 주택이 보편화되었고 개량한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자의 것들은 현관부분을 강조하고 양풍 응접실과 일조(日照)가 좋은 위치에 거실을 둔 것으로 일제시대 일인들이 살던 주거지를 중심으로 주로 건축되었다. 한옥은 동서양 문물이 조우하는 상황에서 개량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부엌 개조, 찬방의 기능 부여, 행랑의 이동 및 집의 다층화 등 실현 가능성 있는 대안들이 쏟아졌다.

개량 한옥은 북촌 누상동 성북동 등에 아직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차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의 인구집중과 일본인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주택난이 심화되었고, 1941년 조선주택영단의 창설과 함께 공업근로자를 위한 공동주택이나 연립주택 · 관사 · 아파트 등의 새로운 주거유형이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8 ·15 광복 후 정치 · 사회적 불안정이 계속되고 자원도 부족할 뿐더러, 산업기반 또한 탄탄하지 못한 탓에 한국의 건설 동력은 움직이지 못했다. 특히 6 · 25 전쟁을 겪으면서 전 국토가 파괴되고, 북한에서 수백만의 피난민이 이주해옴으로써 한국의 주택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1960년대까지 이러한 어려움이 지속되다가, 정부가 공공주택을 건설하고자 노력하고 민간자본이 주택건설에 참여하면서 대규모 택지가 개발되고 주거의 질적 내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1980년대까지 경주되었다. 급진적인 도시화로 생활양식이 급격하게 서구화됨으로써, 주택의 양식 또한 편익성과 기능성을 우선으로 구성과 설비로 바뀌고, 건설의 경제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한옥은 한국의 주거 전통성을 유지하기 힘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문제와 생태중심적인 주거공간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한옥의 생명력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간의 방황이 바로 우리 의식주를 그대로 담는 우리만의 주거양식이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