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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1. 언어 예절의 중요성

언어 예절의 중요성
예절의 실제는 마음속에 의사로 숨겨져 있어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하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밖으로 드러내어야 하는 데 그 수단의 하나가 말이다.
말은 의미가 담긴 소리이며, 어떤 소리에 무슨 의미가 담는가는 생활문화권에서의 공통되는 약속으로 이루어진다. 언어예절이란 소리에 담긴 의미가 사회적 약속에 합치해야 하는 것이다.
언어예절은 호칭과 아울러 말의 맵시와 말씨 및 어휘의 선택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말의 맵시
• 사용언어의 결정: 말은 대화상대가 알아듣는 언어로 해야 의사가 바르게 소통된다.
• 될 수 있는대로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
• 대화 상대가 알아듣기 쉽도록 어렵지 않게 말해야 한다.
• 같은 말이라도 고운 말을 써야 한다.
• 전문용어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끼리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 말에도 감정이 있고 모양이 있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 말 속에 담기고,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 말의 색깔을 다르게 하고, 음성의 강약과 높낮이가 말의 모양을 결정한다.
• 대화할 때는 안정된 감정으로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
• 표정을 부드럽게 지어 말해야 한다. 나지막하고 조용한 음성과 필요에 따라 강약을 조절하는 말투는 듣기에 편하고 이해하기가 쉽다.
• 정확한 발음과 적당한 말의 속도가 중요하다.
• 상대가 관심을 갖는 말은 한다.
• 환경과 경우에 맞는 화제여야 한다. 혼인집에서 초상치르른 이야기를 하거나 등산가서 낚시하는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
• 화제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 듣는 사람의 성격과 수준에 알맞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상대방의 교육정도와 취미, 직업에 적합한 이야기를 해야 재미있는 대화가 된다.
• 말할 대는 성의를 다해 열심히 진지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듣는 사람도 진지해진다.
• 몸가짐을 바르고 조용하게 한다.
• 손짓과 몸짓이 말의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

⊙ 말씨와 어휘의 선택
• 높임말과 낮춤말: 대화상대에 따라 높임말과 낮춤말을 가여서 써야 한다.
⊙ 존대어휘와 하대어휘(앞의 것은 보통어휘이고 뒤의 것은 존대어휘이다)
밥 → 진지, 먹다 → 잡수시다, 주다 → 드리다, 말 → 말씀, 말하다 → 여쭙다 , 혼•야단•꾸중 →걱정, 자다 → 주무시다, 죽다 → 돌아가시다, 골내다 → 화내시다 성질 → 성품, 저 사람 → 저 분, 보다 → 뵙다, 데리고 → 모시고, 있다 → 계시다

⊙ 말씨와 어휘의 실제 응용
• 어른에게는 높임말씨와 존대어휘를 쓴다.(선생님, 진지 잡수세요)
•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말할 때는 아버지를 낮춘다. (할아버지, 애비가 밥 먹었어요)
•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를 말할 때는 모두 높인다. (할아버지께서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 아랫사람에게 웃어른을 말할 때는 아랫사람은 낮추고 웃어른은 높인다. (얘야, 선생님께서 어디 가셨니?)
•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아들을 말할때는 모두 낮춘다. (피터야< 네 애비 언제 온다고 하더냐?)

⊙ 직접대화의 예절
말을 하는 예절
• 대화 상대에 따라 말씨를 결정하낟.
• 감정을 평온하게 갖고 표정을 부드럽게 한다.
• 자세를 바르게 하여 공손하고 성실하게 의젓함을 지닌다.
• 대화장소의 환경과 상대의 성격, 수준을 참작해 화제를 고른다.
• 조용한 어조, 분명한 발음, 맑고 밝은 음성, 적당한 속도로 말한다.
• 듣는 사람의 표정과 눈을 주시해 반응을 살핀다.
• 상대가 질문하면 자상하게 설명하고, 의견을 말하면 성의있게 듣는다.
• 표정과 눈으로도 말한다는 진지함을 잃지 않는다.
• 남의 이야기 중에 끼어들지 않는다
• 화제가 이어지도록 간결하게 요점을 말해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 말의 시작은 양해를 얻어서 하고 끝맺음은 요령있고 분명하게 한다.
말을 듣는 예절
• 말을 귀로만 듣지 말고 표정•눈빛•몸으로도 듣는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 바르고 공손한 자세아 평온한 표정으로 듣는다.
• 상대가 알아차리도록 은근하면서도 확실한 반응을 보인다.
• 말허리를 꺾으면서 끼어들어 질문하지 말고, 의문이 있더라도 말이 끝난 뒤에 묻는다.
• 질문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할 때는 정중하게 말한 사람의 양해를 구한다.
• 몸을 흔들거나 손이나 발로 엉뚱한 장난을 치지말고 열심히 듣는다.
• 말을 듣는 중에 의문나는 점을 메모한다.
• 대화 중에 자리를 뜰 때는 양해를 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한다.

  1. 말씨와 마음씨

사람과 사람들이, 자기 뜻이나 느낌을 서로 주고 받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말이다.

그런데 한 민족의 언어생활을 보면, 그 민족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개인의 언어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사람의 말씨를 들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품위, 그리고 교양들을 모두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우리는 늘 조심하고 품격을 유지하려고 힘써야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의 말이란 사람들의 행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될 것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오고 가다가 길에서 마주치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서로 인사를 하며 길을 비켰었다. 그러나 요근래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길에서 마주치면, 남의 앞가슴을 거의 후려치다시피 하며 지나간다.

이런 일은 이제 교내에서도, 또는 종로 네거리에서도 수없이 당하는 수모의 하나가 되었다. 사람의 앞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젊은 교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왜 이렇게도 우리들 주변에는 오만(傲慢)만 있고 겸손이 없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오로지 자기만 있고 남의 처지를 생각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는 마음가짐들이 어째서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는지, 나 나름대로 그 원인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아마도 모든 원인은, 19세기 말기부터 여러 차례 우리 사회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우리의 전통이 급속도로 무너져 버린데다가, 요근래에 이르러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놀라울 만큼 향상된 데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서도, 또 나이많은 사람들이 겪었다는 길고 길었던 고난기간을 짧은 시일 안에 극복하고서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데서 나온 자신(自信)과 오만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생활태도가, 사람 앞을 지나가면서도 「미안합니다」하고 인사말 하나를 하면서 비켜 갈 줄 모르고, 아무 앞에서나 ‘나는, 내가’ 하고도 왜 잘못했는지를 모르게 만든 것이리라.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여 원만히 살아가려면, 언제나 서로 어려워 하고, 상대편의 인격을 최대한으로 존중해가며 살아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에서 경어법(敬語法)도 발달하고 겸양하는 말씨도 생겨났다.

사람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같은 법이어서 아무리 경어법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는 영어나 중국어에 있어서도, 있을 것은 다 있어서 존경을 나타내는 표현법도 있고 말을 부드럽게 돌려서 완곡(婉曲)하게 표현하는 방법도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모두들 단어 하나를 쓰더라도 골라서 쓰느라고 조심하고, 어미(語尾)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세심한 주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경어법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토록 마음을 쓰는데, 경어법이 남달리 발달되어 있다는 우리말을 사용할 때에, 우리 국어의 어법이나 화법에 맞도록 옳게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은 것 같다.

속이 알찬 사람이, 머리를 수그리면 수그릴수록 여러 사람들한테서 존경을 더 받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 그대로 말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마음가짐을 곱게 갖고, 말도 조심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어려워한다는 것이,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하는 길일뿐만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도 대우를 받고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어간에 붙이는 어미에 따라 ‘합쇼’체• ‘하오’체• ‘하게’체• ‘해라’체 등으로 가른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해’하는 반말체와 거기에 ‘요’를 덧붙인 ‘해요’체가 크게 쓰이고 있다. 그래서 마음 속의 고마움을 전하는 ‘고맙다’는 말도 어미에 따라 그 공손함이 덜하고 더할 수 있다. 그러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감사합니다’ 보다는 낮은 말로 잘못 아는 이들도 있지만 ‘고맙습니다’가 ‘감사합니다’보다는 오히려 더 정답게 우러나오는 느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손윗사람에게 철없는 젊은이들이 더러 그 좋은 말의 꼬리는 자르고 ‘고마와요’해 버릴 때에 좀 성의없이 보인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다. 어디 한번 은혜를 되로 받았더라도 말로라도 말로 좀 갚아 보면 어떨는지? 부드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고마워해 보자.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수고하세요’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손아랫사람에게 하기에도 좀 부자연스러운 말씨다.

이름도 모르는 고마운 손길이 눈길을 쓸거나 지하도 입구의 청소를 도맡아 해줄 때에 ‘수고하세요’보다는 「아주머니, 고맙습니다」하든지 「아저씨, 고맙습니다」하든지 그저 「고맙습니다」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군대의 용어들이 일반 가정의 말씨에까지 침추되고 있다. 씩씩한 군인들의 거수 경례를 딱 붙이면서 자기네의 상사에게 「식사하세요」

「식사하셨습니까?」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는 어울리는 말투이다. 시대감각에 좀 뒤지게 들릴지언정 한 번 「진지 드세요」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옛 아낙네들은 초를 ‘단 것’, 곰팡이를 ‘꽃’, 된장에 생긴 구더기를 ‘가시’라고 어여쁘게 표현할 만큼 듣기에 껄끄러운 말을 삼갔다.

좀 더 조신하고 고운 말을 쓰기 위해서는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 그런 말이 나올 마음을 곱게, 너그럽게 가꾸는 것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고서 나쁜 것도 주책없이 배우라고 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듣고서 덮어놓고 배우라고 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들은대로 지껄이라고 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고 생각하고, 듣고 생각하고, 내 마음의 거울을 거쳐, 진실로 아름답고 서로를 조화시킬 수 있는 값진 말만을 하라고 우리에게 입을 점지하신 것이다.

돈을 주고 샀다 해서 남의 공이 메꾸어 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주었다 하더라도 남의 노고의 고마움이란 그것으로 그만 비겨버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돈으로 바꾸어진다고 생각하는 물건이나 돈으로 치루어지면 그만이라는 노동의 댓가 말고도 세상에는 죽어도 갚을 길 없는 고마움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다정한 위로의 말이나 격려의 말일 수도 있고, 갈림길에서 새출발을 다구치게 하는 기막힌 충고일 수도 있다. 때로는 말이 없는 고요한 눈길, 따뜻한 악수, 빙그레 도는 잔잔한 미소---. 이것이 어떤 인생에 있어서는 자기의 영원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보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이런 묘한 인간의 공동체이고, 이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속 깊이 서려있는 감정이란 또 얼마나 여리고 여물지 않은 곡식의 알같은지!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는 가정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것도 가장 생동생동하게 살아 있는 멀쩡한 정신상태로 보내는 곳이 저마다의 직장이다.

「야! 사장 있어?」

전화로 불러대는 이 말씨는, 죽마고우에 대한 허물없는 말투일 수 있다. 그러나 단둘이서 혹은 집에서 그와만 나누는 대화라면 또 모른다. 점잖은 터에, 더구나 한 기업체에서 수많은 사원을 거느리고 있는 친구에게 조금은 예의를 갖추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여보세요, 사장님 나오셨어요?」하고.
물론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여봐! 우리 사장님 계신가? 김과장 아냐?」
「야, 미스김. 이사장님 계시냐? 너 좀 가봐라.」

자기에게는 소중한 사장님이고 이사장님이시다. 그렇다고 당신의 영감께는 깍듯한 공댓말을 써대면서 남의 댁 귀한 분들에게는 김과장이니 미스 김이니 붙이고는 반말지거리를 한다는 것은 경위가 아니다. 당신의 영감님을 보좌하고 받들어 드리는 분들에게 속에서 넘치는 고마움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존댓말은 자연히 나오기 마련이다. 허기야 존경심은 있어도 받드시 올바른 경어법을 쓰는 것도 아니긴 하다.

「사장님, 나 불렀어요? 나 오시라고 왜 그랬어요?」

존댓말도 전혀 안써 버릇하면 익숙하지 못하다. 이렇게 상대방에 대하여 자기만 높이는 말투는 긴장한 대학생들도 가끔 교수 앞에서 실수하는 터다.
어른에도 칭아가 있다. 집에서도 할아버지 앞에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할아버지, 아비가 그러던대요.」해야 옳드시 말이다.

사장님 앞에서는 과장님을 대등하게 높이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사장님, 제가 한 말씀 여쭤보겠습니다. 아까 김과장더러 절 오라고 하셨다면서요. 정말 부르셨나요?」상대방을 높일 때는 하찮은 나의 말도 말씀이 된다. 그러니까 으례 「제가 한 말씀」식으로 나와야 한다. 가령 집에서 며늘아기가「아버님 아까 돌쇠아빠계서 나한테 말씀하시기를 이따가 다섯시까지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꼭 오실 거예요.」라고 한다면 남편에 대한 존대말은 시어버지에 대한 격과 꼭같아져서 시어버지에 대한 공경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경우와 같다. 「아버님, 아까 돌쇠아비가 저에게 말하기를 이따 다섯시까지 오겠다고 했어요. 꼭 올 거예요.」 라고 해야 아버님만 높이게 된다.

앞에서도 말씀 드린 대로 존대말은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자기 회사, 자기 직장의 모든 식구들을 아들처럼 딸처럼 사랑으로만 대하고 온갖 고생과 기쁨을 같이 나눌 때만 진정한 사랑은 맺어지고 거기서 고마움과 존경심도 우러나오게 마련이다. 백마산성을 쌓을 때 땀을 흘리는 장병틈에 끼어 같이 돌짐을 지고 못을 파 물고기를 길러 그들의 반찬까지 걱정한 임경업장군처럼 말이다.

전화에 대고 연방 「네에 네에 네에」를 고개까지 숙여가며 퍼붓다가는 수화기를 탁 내려 놓는 순간 「------」입에 못담을 욕지거리를 부하직원 앞에서 서슴없이 내어뱉는 어른들은 무엇을 보여주고 교육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누워서 침 뱉기임을 모르는 것일까? 벽에다 「상호존중」이란 표어만 붙여 놓으면 만사는 해결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이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속담이 있다. 아껴주는 마음에 존경하는 마음이 메아리치는 법이다. 사원에게 존대말을 가르치려면, 웃사람의 말씨가 고와야 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우린 으례 그들에게부터 존대말을 써주지 않는가. 그래야 어린애들은 「진지 잡수세요」를 쓸 줄 알게 된다.

경어는 물론 언어사회의 약속이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게 하는 것은 속에서 우러나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리고 남이 쌓아올린 기막힌 노고를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의 역사를 얼굴에서 몸에서 읽을 때, 그 중 가장 고귀한 것만을 읽을 줄 아는 귀한 눈도 우린 갖추어야 한다.
아무나 깔보고 아무나 마구잡이로 욕지거리 하고 짓이겨 버리려는 천덕스러운 마음은 서로가 버려야 한다. 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경어도 나오고, 그 마음이 상호유대도 맺어주고 밝은 사회에의 주춧돌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도 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가장 귀한 것이다. 마음에 없는 경어는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며 자신에 대한 기만이다. 진실로 올바를 경어를 쓸 수 있도록 환하게 살아보자.

원래 말이란 그것을 쓰는 언어사회의 습관으로서, 어떤 개인이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말인데도 어느 집에서는 반말로 쓰이는데 딴 집에서는 존대말로 쓰인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집에서 입에 오르기를 꺼려하는 단어는 다른 집에서도 입에 담기를 싫어한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말 한마디 하기를 모두 조심하였고 조상 어른의 함자(이름)나 그 집안의 내력과 관련이 있는 단어는 되도록 삼가하기도 하였다. 이와 반대로 어떤 단어나 말씨는 부정(不淨)이 탄다고 하여 처음부터 쓸 엄두도 내지 않았었다. 이러한 모두가, 말을 무섭게 여겼고, 말씨를 조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씨를 아무렇게 해도 「염려하지 마세요. 서로 존경하며 잘 살아요」하며 큰 소리를 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끔 뜻밖의 (아니 예상했던대로) 말이 들려 오는 수가 있다.

「이게 웃기고 있어!」
「뭐? 너 쪽 팔렸니?」
「뭐라고? 너 진짜 죽을래?」

일은 애당초 이렇게 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결정적’인 단어까지 튀어 나오게 되어 아주 쉽게 파탄이 났다는 것이다.

「난 정말 네가 이런 줄 몰랐었다. 이런 줄 알았다면 누가 너 같은 천치바보와 결혼했겠니?」
「속은 것은 바로 나다. 네가 이런 사기꾼인 줄 알았더라면, 너 같은 것한테 누가 시집오니!」

말이란 아무말이든지 앞뒤 생각도 없이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법일 것이다. 더군다나 남의 가장 아픈 곳,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들은, 상대방이 아무리 어린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자기 반려(伴侶)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말까지도 서슴치 않고 하는 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말버릇일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따지고 보면 애당초의 시작은 역시 말씨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말은 자기의 사상, 감정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늘 존중하고 어렵게 여긴다면, 반말이나 ‘해라’대신 존대말로 대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무리 ‘선생님, 당신은---‘이라고 했어도 듣는 쪽에서 ‘선생, 너---‘라고 알아 듣는다면, 처음부터 존대말로 한 것만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어느 가정의 예의범절 강신항, 정양완 교수 정일출판사 1990

  1. 가정교육

근래 우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실지로 몸가짐을 어떻게 갖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두들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옛날에는 집안의 노인어른들과 서당의 훈장이 어린이의 말씨 하나, 걸음걸이 하나, 심지어 절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자상하게 타일러 주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계단 위의 벤치에 앉아서 두 무릎 사이를 오므릴 줄 모르는 처녀들 때문에 계단을 오르다가 이쪽에서 당황해지는 수가 많다. 또 길가에서 사람이나 차를 기다리고 있으면, 젊은 남녀들이 코 앞 10센티 앞으로 가슴까지 건드리면서 지나간다. 가령, 앞에 전주가 서 있다고 하더라도 비켜 갈 궁리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일텐데, 앞에 어떤 하나의 인격체가 서 있는지 전연 관심이 없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모든 행동이 ‘나’만 알고 남을 의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결과이다. 사람이 사회라는 공동체를 구성하겨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남과 나와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지켜야 될 것을 지켜야 되고, 내가 소중하다면 남도 소중하다는, 가장 기초적인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마음은 말씨로 나타난다. 60년대 이후로 남녀공학의 기회가 넓어지고, 여러 직장에서도 남녀가 함께 일하은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한국 청소년층의 언어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다.

한국어는 경어법이 발달된 언어로 남과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말하는 이와 듣는 사람과의 사이가 어느 정도 친한가 하는 친소(親疏)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연령관계, 친척관계, 직장에서듸 위 아래 관계, 사회적 지위 등등을 따져서 말씨를 달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고 호칭에까지 크게 마음을 써 왔었다. 그러나 요 몇년 동안에, 이런 전통적인 언어생활을 젊은 세대가 싹 바꾸어 놓았다. 같은 과 동기생끼리 결혼한 두 쌍의 부부들이 음식점에 앉아서 서로 상대방의 부인을 ‘너’라고 부르고 있다. 결혼 후에는 자기 아내에 대해서조차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언어습관이었는데, 이제는 친구으 아내 이름까지도 마구 불러대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언어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말하는 이의 마음가짐을 나타낸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여 그 사람의 이름조차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대신 부를 수 있는 자(字)까지 마련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사람의 이름을 마구 내뱉으면서도 서로 존경할 수 있느지, 그런 사이에서 어떻게 원만한 부부생활이 유지되고 있는지, 시대의 흐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경어법이 없다는 중국어나 영어에도 엄연히 남을 존중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방식이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이러한 언어생활은, 격식을 가장 엄히 여기는 편지쓰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편지 겉봉에, 어른 이름만 써 보내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른다. 선생이 어린 학생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꼳 ‘군’이나 ‘양’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예의인데, 겉봉에다 이름 석 자만 써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보았을 때에는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사람의 됨됨이를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예의란 결국 그 사람의 교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교내 어디를 가나 학생들이 넘쳐 흐르는데, 길을 비켜 주기는 커녕, 빤질빤질 쳐다보면서 인사조차 않은 학생들이 꽤 많다. 그러면서도 마주치면 어찌된 영문인지 담배불만은 부지런히 뒤로 감추거나 밟아 끄기에 바쁘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모두를 전연 모르는 것은 아닌가 보다하고 생각하게 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준도 달라졌고 표현방법도 달라졌지만, 어느 누구든지 마음 속에 깊이 깔려 있는 기본 자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이들의 버릇이 없다, 예의도 모른다 하고 탓하기 전에 사람으로서 염치를 알고 어떻게 몸가짐을 갖는 것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원만하게 살아가는 길이 되는 것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알게 된다면, 초청자의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큼 음식을 먹어 치운다거나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이(齒)를 쑤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대가족 집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부모님들의 모습은 조부모님의 그늘에 가리워져 어렸을 적의 가르침은 할아버님•할머님 말씀만이 더 강하게 기억속에 남아있다.
할아버님은 비길 데 없이 인자한 어른이셨다. 할머님께서도 남달리 자손들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계셨겠지만, 어릴 적 마음에는 오직 무서운 할머님이라는 인상이 더 컸었다.
할머님의 교육방법은 철저하셔서, 근검과 절약을 제일주의로 하셨고, 게다가 스파르타식이어서, 게으름•사치•낭비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셨다.
다섯살부터는 서당에 다녔는데, 그 시절만 하더라도 재래식 유교적 예법을 중히 여기던 시대라, 사랑방에 손님이 오시면 할머님께서 가르치신대로 꼭 큰절을 시키시었다. 그러면 손님들께서도 반드시 공식적으로 묻는 말씀이 있었다.
「성이 무엇이냐?」
「네, 진주 강가입니다.」
「어느 어른 자손이지?」
「네 통계공 후손입니다.」
「어허, 참 숙성하군!」
통계공(通溪公)이 어느 어른이신지, ‘숙성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몰랐었지만, 할아버님•할머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두손을 앞으로 공손히 마주잡고 손님 앞에서 술술 외워대는 손자들이, 손님들로부터 칭찬받고 있는 것을 크게 만족스러워 하시던 할아버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에는 서당의 훈장선생이 동네의 가정교사와 같은 자리에 있어서, 서당교육과 가정교육이 일치가 되어, 서당에서 배운대로 집에서 실행하는 일이 많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제대로 입고서 방마다 어른들을 찾아뵙고 문안인사를 드린다든지, 길에서 어른을 만나 뵈면 길 옆으로 비켜 서서 인사를 드리곤 하였었다. 이런 습관이 학교에 들어가 신식교육을 받게 된 이후부터 차츰 문란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부모님께서 어린 손자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계셨으면서도 애정표시를, 응석을 받아 주시는 것으로 하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엿이니 조청이니 하는 것을 집에서 고아 먹은 일도 없었고, 과자를 사 주시는 일도 없었다. 곳간에 곡식이 쌓여 있었어도 밸일잔치니 돌잔치니 하는 것도 없었거니와, 생일날이라고 해도 꽁보리밥 대신에 흰 쌀밥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손자들은 조부모님 진지상 앞머리에 앉아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할머님께서는 항상 찌개국물을 질질 흘리거나 비벼 먹던 밥 남기는 일을 몹시도 경계하셨고, 상위에서 맛있는 음식을 어른들께서 집어 주시기 전에는 감히 두 팔을 내저으며 독점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이래서 식사시간은 늘 엄숙했었는데, 배불리 먹었다고 길게 누워 있을 틈도 없었다.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조부모님들께서는 손자들에게 일을 시키셨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불때기, 들에 나가서는 보리나 벼이삭 줍기,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밭에 나가 새벽 4시 반부터 김매기, 마당가 풀뽑기, 타작 때에는 볏단 나르기 등등 농가에서 하는 일을 거의 안한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오로지 일하며, 아끼고 잠시도 놀 틈도 안 주셨지만, 자녀들의 교육에는 남다른 열의를 가지고 계셨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아끼지 않고서는 시골 농가에서 도저히 학비를 못 대셨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일찌기 우리 어린 것들에게 재화(財貨) 모으는 일에 눈을 뜨도록 하신 일은 없었다.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수업료는 할아버님께서 직접 대납(代納)하셨으므로 우리는 돈을 알 기회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소풍날에도 무우말랭이 반찬, 우산 대신에 푸대쓰고 다니기, 운동화 대신에 고무신 신고 다닐 때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뒤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일에 부딪힐 때마다 새삼 조부모님의 가르침이 고맙게 여겨지는 것이다.

젊은이드은 대망(大望)을 가져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 대망이 허황된 야망이나 도저희 이룩할 수 없는 헛된 꿈으로 변하는 일도 있으나 애당초부터 건전한 목푤르 크게 이루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한눈 팔지 말고 정진(精進)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대망이 허황된 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건전한 오락과 몸가짐을 갖도록 힘써야 된다. 옛부터 양지(養志)라를 말이 있었다.
양지란 바로 앞으로 크나큰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자기의 뜻을 굳게 세운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시절에 한가하게 당구장에서 밤을 새운다거나, 넋빠진 사람처럼 온종일 비디오나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바야흐로 오늘날의 세상은 국제화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겨레의 미래에 책임을 지고 나아갈 청소년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심신단련에 힘을 기울이고 세상을 넓게 멀리 꿰뚫어보는 큰 인물이 되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독서와 수양에 힘쓰몀서 어느 누구든지 노력하기에 따라서 작게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크게는 온 인류를 위하여 뜨거운 사랑과 정열을 가지고 얼마라도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