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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예(禮)란 무엇인가?    

예절이란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샐활규범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바,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막혀 수월하게 무리를 지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일정한 지역을 생활문화권이라 하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모두 그렇게 행하는 생활방법이 예절이다.

때문에 예절은 언어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민족과 나라에 따라 언어가 다르듯이 예절도 국가와 겨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도 산과 강을 경계로 해 사투리가 있듯이 예절도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를 정해 그것이 통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예절도 한 나라에서는 통일되어야 그 국민으로서 생활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가장 바람직한 생활방법을 익혀 어울려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통일된 바른 예절을 알아야 하겠다.

  1. 왜 인류는 옷을 입게 되었는가?

왜 인류는 옷을 입게 되었는가?

첫째, 수치스러워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둘째, 장식설이다. 꾸밈의 본능이 옷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셋째, 실용설이다. 옷은 자연으로부터의 육체보호다. 원시인이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토굴을 파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으로부터 육체를 보호하기 시작했으며 체온을 보호하기 위한 옷이었다. 어떤 형식이든 주거의 발명은 육체의 피부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그 약화된 육체를 자연과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공적인 피복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원시 시대의 옷의 기원설은 곧 신화(神話) 시대에서 유사(有史)시대로 옮아오는 원시시대의 한국인이 입었을 옷의 정의일 수도 있겠다.

이같이 하여 유사시대의 한국에는 이미 뽕을 길러 명주를 짜 입었으며, 삼을 재배해 삼베를 짰으며, 나무 껍질에서 섬유를 뽑아 면포(綿布)를 짜 입었고, 짐승털을 뽑아 털베를 짜 입었던 것이다.

히말라야 산속 네팔에는 아열대의 특수한 나무에 기생하는 가느다란 섬유질 식물로 베를 짜는데 올이 굵고 엉성하여 한국의 삼베보다 한결 성근 베였다. 이 베를 히피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이 베가 세상에서 가장 원시적인 베의 형태를 보존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히피는 현대 문명에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엉성하게 짠 히말라야의 베가 매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겨우 한 자 폭밖에 안 되는 이 베를 너댓 폭 이어서 복판에 목이 들어갈 만큰 구멍을 뚫고 걸치기만 하면 된다. 그 밖에는 아무런 재봉이나 가공이 없다. 물론 내의도 입지 않는다. 이 네팔의 히피 옷이 곧 유사(有史) 이전의 우리 한국인들이 입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우비처럼, 목이 들어갈 구멍만 뚫은 그런 간단한 가공의 옷을 관두의(貫頭衣)라 했다. 관두의는 한국 복장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으며 여기서부터 한국의 복장이 발달하게 된다.

그 맨 첫 발달단계가 구멍을 뚫되 뚫린 구멍을 버리지 앟고 칼라로 남겨두는 형태요, 두 번째 단계가 겨드랑 밑을 꿰매어 동체와 팔을 구분하는 형태요, 세 번째가 소매를 따로 만들어 다는 형태인 것이다.

관두의의 구멍도 맨 처음에는 머리만 들어가도록 뚫린 것이 차츰 가슴팍으로 잘라내어 옷섶으로 발달했던 것이다.

이 옷섶이 옷 끝으로 잘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햇던 것 같다. 곧 옷를 머리부터 꿰어입는 관두의 형태에서 요즈음 처럼 앞섶이 완전히 분단되어 소매부터 옷을 입기끼지는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집안(輯安)의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장사도(三室塚壯士圖)와 고구려 벽화 무용총(舞踊塚)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옷섶이 완전히 좌우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허리띠를 둘러 배꼽 부분까지만 갈라지고 띠 아래는 갈라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용강대안리(龍岡大安里)의 1호분 벽화와 수산리(修山里) 고분벽화에는 이 옷섶이 완전히 갈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옷섶이 가슴팍부터 길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의를 끄는 것은 이 좌우(左右) 옷섶의 어느 쪽이 위로 가고 밑으로 갔느냐의 차이다.

한반도의 복식이 북방계 기마민족(北方系驥馬民族)의 복식과 같다는 것은 서역(西域)의 아스타나에서 발견된 목조(木彫) 남녀상(男女像)등 기마 민족들이 살았던 지역의 출토물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서역 기마 민족의 옷섶이 모두 왼쪽 섶이 위로 간 왼섶이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장수왕(長壽王) 이전의 고구려 초기에는 북방 기마 민족의 영향을 받아 왼섶이었던 것이 차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오른섶으로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북방 기마 민족은 왼쪽을 숭상했는데 중국 민족은 오른쪽을 존중하였다. 한국, 인도, 북방 기마 민족의 문화권에 속했을 때는 존좌(尊左)했는데, 중국(中國) 문화권에 속하면서부터는 존우(尊右)하게 되어 오늘날 존우(尊右)와 존좌(尊左)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머리 위에 손댈 일이 있으면 오른손으로 하고 소변을 본다든가 신발을 신는다든지 하는 하체에 손댈 일이 있으면 반드시 왼손으로 했다.

반면에 좌존(左尊) 습속도 더러 남아 있어 이를테면 우의정(右議政)보다 좌의정(左議政)이 더 높다든지 딸보다는 소중했던 남자의 위치가 항상 왼쪽이어야 했던 것이다.

기마 민족은 기마에 편리하게끔 바지의 폭이 살에 붙게끔 좁아야 했고 이 기마 민족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의 바지통은 좁았었다. 이 좁은 바지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높은 사람일수록 그 통이 넓어졌다. 고구려 고분인 쌍영총(雙楹塚) 감신총(龕神塚) 등의 벽화를 보면 시종(侍從) 급 인물들은 홀태바지를 입었는데 이보다 높은 듯한 인물은 통이 너른 바지를 입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이 고대 한국인은 투피스에 띠를 두르는 활동적인 복장을 했던데 비해 중국인은 관두의(寬頭衣)를 발끝까지 늘어뜨린 원피스를 입었기로 적이 비활동(非活動) 정이었다. 중국의 전국시대인 서기전 3백 년에 조나라의 무녕왕(武靈王)은 그들이 저주하는 이민족인 호족(胡族)의 옷을 전투복으로 채용했었다. 그들의 전복(戰服)인 원피스로는 말타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 혁명적인 처사를 두고 조나라의 신하들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오랑캐의 상스런 옷을 군자의 나라에서는 입을 수 없다는 명분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명한 무녕왕(武靈王)은 이 편리한 활동복을 채용함으로써 중국에서 최초로 바지를 입게 하였다. 만약 무녕왕의 영단(英斷)이 없었다면 한국인은 바지란 것을 모르고 살아 왔을지도 모른다.

기마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때는 투피스였으나 그 후 한(漢) 민족의 지배에 있는 동안 이 투피스 위에 두루마기를 입는 중국 복식이 복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곧 간편하고 활동적인 북방계(北方系) 복장에서 복잡하고 비활동적인 복장으로 복합 전화하는 과정에서 겉옷(두루마기)이 생기고 옷소매가 필요이상으로 길어졌으며 바지통은 넓어져 치마인지 바지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