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story of Korea

The Fluorishing Aristocratic Society

  1. Korean

번영하는 귀족 사회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다

10세기 초, 한반도에는 고려, 중국에는 송나라, 만주에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거란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진 정책을 펴는 고려와 충돌이 일어났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에 대해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한편, 중국을 다시 통일한 송도 고려와는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거란과는 대립하였다. 이에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 위해 먼저 배후 세력인 고려를 침입하였다.

처음 침입 때는 문관인 서희가 나서서 외교적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는 한편, 송과의 관계를 끊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6주를 돌려 받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화해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여전히 송과의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란과는 관계를 멀리하자 재차 침입해 왔다. 이 때 개경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시 거란과의 친선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고, 그 때 물러가는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불만을 가진 거란은 이어 3차 침입을 하였으나, 이때에는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고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거란을 물리친 두 영웅, 서희와 강감찬

서희는 본래 문관이나 문무를 겸비하였고, 사리도 분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거란이 처들어 왔을 때, 고려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화해하자는 주장이 우세하였으나, 싸울 것을 주장한 서희는 적장 소손녕을 만나 당당한 태도로 담판하였다.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압록강 안팎이 고려의 영토이니, 만약 여진을 내쫒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해 주면 당신네 나라와 통교할 것이다.”라고 설득하였다. 서희는 창과 활 대신 ‘세 치의 혀’로 적을 감탄시키는 담판을 한 것이다. 서희의 주장이 옳음을 인정한 적장 소손녕은 서희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되돌렸다. 고려는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쳤으며,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는 성과를 올렸다. 역사상 가장 값진 승리였다.

강감찬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호족 집안의 후손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다.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자, 강감찬은 총사령관이 되어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퇴하였다. 강감찬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강물을 막았다가 이를 터뜨려 공격하여(수공 작전) 큰 전과를 올렸고, 거란군이 개경으로 침공해 들어오자 주민과 식량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전술로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거의 전멸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여진의 침략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다.

만주에서 거란족이 쇠퇴하면서 이번에는 여진족이 일어나 고려를 침입해 왔다. 고려는 정벌군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는 상대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윤관 장군은 별무반이라는 기병 중심의 특별 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족을 천리장성 북쪽으로 쫒아 내고, 그곳 동북 지방에 9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족의 간청에 따라, 여진족으로부터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고려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동북 9성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 더욱 강성해진 여진족은 ‘금’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금은 송과 연합하여 거란을 멸망시킨 후 송마저 강남으로 내몰고, 중국의 화북 지방을 차지하였다 금은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취하라고 압박해 왔다. 당시 고려의 최고 실력자인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집권자들은, 정권 유지의 필요성에서 그들과 싸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는 국제적으로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건국 초기부터 계속되던 북진 정책은 일시 중단되고 말았다.

불교와 유교가 함께 발달한 나라

고려는 불교가 가장 융성한 나라였다. 고려인들은 불교가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게 현재 생활과 내세에 행복을 주다고 믿었다.

고려 태조는 후손에게 “고려는 불교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이므로 절을 세우고 불도를 닦으라.”는 교훈을 남겼다.

승려는 사회에서 높은 대접을 받아, 왕족과 귀족 중에서도 승려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들이 여러 명인 경우에 적어도 한명은 승려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왕자 신분인 의천은 (대각) 국사가 되어 여러 업적을 남겼다.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나라를 지키려는 믿음에서 대장경을 만들었다. 한편, 승려들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의병이 되어 적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절은 기술자와 노비의 노동에 의해 베, 모시, 기와, 술, 소금 등 각종 물품을 생산하여 판매하였다. 불교 행사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또, 절은 빈민 구제라는 명분으로 빈민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많은 이자를 받기도 했다. 한편, 절은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안전을 기원해 주고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도 정치•경제적 힘이 커졌다.

고려에서는 불교와 더불어 유교가 크게 발달하였다. 성종 때의 유학자 최승로는 정치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라고 하였다. 즉 고려에서 불교는 개인적인 수양의 원리요, 유학은 국가와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가 되었다. 국가에서 불교 행사를 하는 한편, 매년 2월과 8월에는 공자를 모신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려

관료 사회가 귀족 사회로 변하다.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호족과 신라 6두품 계통의 학자들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광종 이후 계속 유지된 과거제 실시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여 관료 사회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들 관료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잡으면서 결국 신분이 세습되는 귀족이 되었다.

‘코리아’로 세계에 알려지다

고려는 건국 후 송을 비롯하여 거란, 여진, 일본 등 외국인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며 대외 무역을 장려하였다. 예성강 입구에 있는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개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였다. 이곳에는 송나라,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라비아 상인의 무역선까지 드나들었다.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였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는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세계 무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상인들이 가져온 비단, 약재, 서적, 차 등은 고려 귀족들 사이에 인기 상품이었다. 이슬람 상인들이 가져온 상아, 수정, 호박과 같은 보석, 후추와 같은 향신료, 수은, 양탄자 등도 인기를 누렸다.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삼베, 인삼, 종이, 먹 등이 있었는데, 종이와 먹은 당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였다.

 

  1. English

Goryeo Drives Back the Khitan

Goryeo had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Sung Dynasty which had reunited China and was in conflict with the Khitan.

In order to attack the Sung, the Khitan first mounted attacks on Goryeo, which was supportive of the Sung. During the first invasion, Seo Hee made successful diplomatic maneuvers.

As a result, the Khitan acknowledged that Goryeo was the successor to Goguryeo and arrived at a compromise, Goryeo would be returned the six garrisons in the area east of Yalu in return for Goryeo severing ties with Sung China. However, when Goryeo continued to maintain friendly ties with the Sung, and continued to alienate the Khitan, it invaded Goryeo once again. At this point, Gaegyeong fell to the Khitan army, but once again forged a peace agreement with the Khitan on the condition that it would maintain friendly relations with the Khitan. It then defeated the Khitan who were withdrawing. Incensed, the Khitan mounted their third great invasion of Goryeo, but this time the Khitan army was all but annihilated by a massive Goryeo attack at Gwiju, executed by Gang Gam-chan.

Following the war, Goryeo built fortresses surrounding Gaegyong, established a wall all along the border that stretched a 400 km to bolster the defense against the northern people.

Seo Hee and Gang Gam-chan, the Two Heros Who Drove Back the Khitan

Although Seo Hee was a civil official, he excelled both in literary and military arts. He was a man of reason and was in good graces with the king. When the Khitan mounted their invasion, some had strongly contended to seek met the enemy commander Hsiao Sun-ning and made a bold ploy at negotiation. Seo Hee asserted that “Goryeo was the successor of Goguryeo, and that since the area up to the Yalu was Goryeo territory, he would open ancient territories of Goryeo.” Seo Hee succeeded in impressing the enemy with his dazzling tongue rather than with arrows and bows. Hsiao, who acknowledged that Seo Hee’s assertions were correct, accepted Seo Hee’s demand and withdrow his forces. Goryeo drove back the enemy without engaging in battle, and accomplished the feat of expanding its territory up to the Yalu. It was the most valuable triumph in the history of Korea. 
Gang Gam-chan was a member of a gentry family that had contributed in the founding of Goryeo.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with the ranking of first and was appointed to a high ranking position. When the 100,000 strong army of the Khitan, led by Hsiao Pai-ya, invaded Goryeo, Gang Gam-chan, serving as the commander-in-chief, drove the invaders back. Gang Gam-chan dammed the river water to prepare against enemy invasion, and released the water on the invading enemy. On another occasion, when the Khitan army invaded Gaegyeong, he relocated all the residents and the food elsewhere and drove back the enemy. He further achieved the virtual destruction of all of the Khitan army that were retreating in Gwiju. This is known as the ‘Great Victory at Gwiju’.

 

Goryeo Beset Once Again by the Jruchen Invasion

About the time when the power of Khitan was deteriorating in Manchuria, Goryeo was once again troubled by the Jurchen. Goryeo sent an expedition but failed. Goryeo found that it was difficult to counter the mounted Jurchen with its foot solidiers alone. It was for this reason that Yun Gwan created a new military organization called extraordinary military Corps (Byeolmuban), which drove back the Jruchen to the north of the great wall of a 4000km, and built the so-called Nine Forts in the northeastern region. However, upon appeals from the Jruchen, Goryeo returned the region of the Nine Forts to the Jurchen after it vowed never to invade Goryeo and to present offerings to Goryeo every year. 

The Jurchen, which had become more powerful than ever before, founded a state called Chin and claimed itself an empire. Through an alliance with Sung China, Chin overcame the Khitan and eventually drove the Sung down to the south. The Chin put increased pressure on Goryeo as well, and demanded that Goryeo enter into a suzerainty relationship. Yi Ja-gyeom, in power at the time, judged that peaceful relations with Chin would contribute to maintaining his own political dominance, and so he assented to Chin’s demands. As a result, Goryeo was able to maintain peaceful relations in the international arena. The northern expansion policy that had been promoted since the establishment of Goryeo, however, was temporarily suspended.

A Nation Where Buddhism and Confucianism Thrived 

Goryeo was the nation where Buddhism flourished the most. The people of Goryeo believed that Buddhism offered happiness to both individuals and the state, in life as well as in the afterlife. 

King Taejo of Goryeo told his descendants that ‘Since Goryeo was a nation built on the strength of Buddhism, many Buddhist temples should be built and the teaching of Buddhism should be practiced’. 
Buddhist monks were highly esteemed and many in the royal and aristocratic families desired to become Buddhist monks. It was common that in families with many sons, at least one would become a Buddhist monk. Euichen, a royal prince, become ‘Guksa’(National Preceptor), and left behind many achievement.

Goryeo made woodblock printings of the Tripitaka, a complete collection of Buddhist scriptures, as a kind of supplication to prevent foreign invasion and defend the nation with the strength of Buddha. The Buddhist monks also served and fought for the nation when it was threatened by foreign invaders.

The temple also produced various commodities such as hemp cloth, remain fabric, roofing tiles, liquor and salt using the labor of slaves or technicians. Commercial transactions were made naturally as many gathered at temples to observe Buddhist ceremonies. As part of a relief program for the poor, the Buddhist establishments also lent grain to the poor at high interest. Temples also prayed for the safety of those traveling while offering them lodging accommodations. As seen here, Buddhism wielded enormous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while also playing a certain social role. 

In Goryeo, Confucianism greatly flourished along with Buddhism. Choi Seung-no, a Confucian scholar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said that ‘while Buddhism is the basics for cultivating one’s mind, Confucianism is the principle of governing a state’ in presenting his political reform program. In Goryeo, Buddhism served as the principle for cultivating the mind, while Confucianism became the principle of organizing and running the society. While organizing Buddhist events, the state also dedicated religious rituals to Confucius every February and August of the lunar calendar.

고려

The Society of the Ruling Elite Transforms into the Aristocracy

The gentry, wh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founding of Goryeo, as well as scholars, who belonged to the Head-Rank Six status of Silla, formed the central bureaucracy in Goryeo.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s held since the reign of King Gwangjong appointed outstanding scholars and a bureaucratic society took root. However, these bureaucrats clung on to power for a extended period and eventually became aristocrats whose social status became hereditary.

Goryeo Known to the World as ‘Corea’

Following its establishment, Goryeo allowed foreigners to enter the state including those from the Sung, the Khitan, the Jurchen and Japan, and encouraged foreign trade. Byeokrando, an international trade port situated at the mouth of the Yesong River, served as the gateway to Gaegyong. Here, merchants from the Sung, Southeast Asia and Arabia engaged in trade. Goryeo became known as ‘Corea’ by the Arabian merchants who engaged in active trade activities around the world. 
Silk, herbal medicines, books and tea that the Chinese merchants brought were extremely popular with the aristocrats of Goryeo. Ivory, crystal, amber, spices such as pepper, quicksilver, and carpets brought by the merchants from Islam were also very popular. Goryeo, for ites part, exported hemp clothe, ginseng, paper and ink sticks. The paper and ink sticks of Goryeo were of world-class qu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