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story of Korea


The Second Wave 1903-1924

 

  1. Korean

제2시기 (1903~1924)

미주 지역에 대한 공식 이민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의 한인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재미 한인 사회와 미국 정부는 현재 1월 13일을 코리안 아메리칸 데이로 명명하고, 미주 지역의 한인 이주를 기념하고 있다.) 약 7,000여 명의 한인들이 1903년부터 1905년에 걸쳐 하와이로 이주했는데, 내외적인 요인이 있다.

먼저, 내적 요인을 살펴보면, 양반 계급의 착취, 홍수와 가뭄 같은 자연 재해,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 등을 들 수 있다. 초기 이민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로 경제가 극심하게 나빠지고,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한국은 주권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대대적으로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외적 요인으로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에서 값싼 노동력 확보를 위해 모집원을 한국으로 보내 선교사들의 협조를 얻어 한인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화와이로 데려온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는 노동자 분열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하고 통제하는 수단을 썼다. 또, 일본계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인을 비롯해 중국인, 포르트갈인, 필리핀인, 그리고 다른 민족의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하와이로 데려왔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도시 출신 20대 남성들이 었는데, 특히 약 40%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한편,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인구 의 약 10%는 여성들이었는데, 서로 사진을 교환하고 결혼해서 하와이로 온 이른바 사진 신부들이었다. 당시 사진 신부와 신랑의 나이는 무려 평균 10~15세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는 하와이로 이주해 온 한인 남성들은 평균 10년 이상을 일해야 장가를 갈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금혼법이 시행되어 한인과 백인 간의 결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한인 남성들은 미국에서 신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사진 신부로 미주로 건너온 약 800~1,000명의 한인 여성들은 요리사, 청소부, 그리고 세탁원 등으로 일하면서 타국에서의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독립운동

하와이와 본토 초기 한인 사회의 특징은 교화와 독립운동으로 말할 수 있다. 한인 교회는 단순히 신앙과 구원의 장소만이 아니라, 모국의 독립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전략을 세우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교회는 여러 농장에 흩어져 일하고 있던 한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 활동을 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또, 한인 사회의 중심지로서 한국의 미래에 대한 교육 세미나 등이 개최된 곳도 교회였다.

미주 한인 사회 독립 운동의 중심에는 3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무력 항쟁을 주창한 박용만, 외교 정책을 중요시한 이승만, 그리고 교육과 애국 지도력을 강조한 안창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인 사회는 3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열되었다. 무력 항쟁을 주장한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의 헤이스팅 시에 군단을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켰으며, 하와이로 이주해 젊은 청년들을 군사 훈련에 참가 시켰다. 또,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군무 총장 (현재 국방 장관) 이었던 노백린 장군은 쌀농사로 백만장자가 된 김종림의 후원을 받아 독립 전쟁에 참여할 전투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비행기를 구입하여 북가주의 윌로스(Willows)에 비행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이런 무력 항쟁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강대국에 대한 로비와 외교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한인 사회는 양분되었고, 심각한 대립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국민회와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동지회 간의 갈등도 깊었다. 한인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에는 모두 헌신적으로 참여했으나, 방법론에 대한 이견으로 한인 사회가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종림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분열된 한인 사회의 통합과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로서, 비행 학교뿐만 아니라 흥사단(안창오)의 적극적인 회원이었으며, 동시에 동지회(이승만)의 회원이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주 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미주 한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미주 한인들은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무려 20만 달러라는 거액을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모금하였다.

초기 한인 사회의 독립 운동의 본보기는 바로 1908년 발생한 스티븐슨 암살 사건이다. 스티븐슨의 공식 직함은 한국 정부 자문 위원으로 일본 정부가 임명한 직분이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일본의 한반도 정책을 미국 관리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워싱턴 DC로 향하던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발표한 성명성에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였다. 만약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러시아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며, 한국 정부 관리들이 부패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환영한다는 등의 허위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분개했고, 스티븐슨에게 사과하고 발표를 번복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한인들은 스티븐슨을 일본의 앞잡이며 한민족의 배반자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세웠다. 전명운열사도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장인환 열사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처럼 초기 한인 사회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 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소수 민족으로서 인종 차별도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국 사회는 물론 세계 평화에 기여한 한인 2세들도 많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면 김영옥 대령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의 전설적인 영웅, 그리고 약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도주의자였던 김영옥은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리러니컬하게도 한국계인 김영옥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 100대대 442연대에 배치되어 1943 ~ 45년 까지 유렵 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는데, 특히 로마 해방과 피사 탈환의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탁월한 리더십으로 일본계 미국 병사들마저 그를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 전쟁에도 자진 참여하여 커다란 무공을 세우고 전쟁 고아들을 돌보았던 김영옥의 인도주의적 삶은 1972년 은퇴 후에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치에 입문하라는 유혹도 뿌리친 채 그는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봉사활동은 청소년 교육, 노약자 및 여성 보호, 가족 의료에 관한 사업, 문화, 민족, 그리고 예술 분야까지 실로 다양하며, 동포 사회는 물론 미국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다른 한인 2세들 중에서 1948년과 1952년 올림픽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2연패에 성공한 새미리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또, 존경받는 교육가 메리 리 손과 로스앤젤레스의 일본 빌리지를 설계하고 운영했던 건축가 데이빗 현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안창호 선생의 장남 필립 안은 아시아녜 영화 배우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블르버드에 별을 달았으며, 알프레드 송은 아시아계 최초의 주요 정치가(캘리포니ㅏ주 상원 의원)로 활약하였다.

 

  1. English

Between 1903 and 1905, a total of more than 7,000 immigrants arrived in Hawaii from Korea. Both internal and external factors contributed to migration of Korean immigrants to the United States. Internal factors included exploitation by ruling Yangban elite, natural disasters such as famine and flood, and political instability in Korea. This second wave of Korean immigration was greatly shaped by the Japanese invasion of the Korean homeland. Japanese imperialism forced conditions in Korea to worsen and become inhospitable for many. By 1905, Korea became a “protectorate” of Japan, and Japan colonized Korea in 1910. Externally, in particular, American missionaries and recruiting agents sent by the Hawaiian Sugar Plantation Association (HSPA) played a critical role in recruitment and transportation of Korean immigrants to Hawaii during the early 1900’s.

The HSPA actively pursued the “divide and rule” strategy to lower wages and control the labor force in Hawaii. To counter Japanese dominance of the labor force in Hawaii’s sugar plantation, Korean workers, along with Chinese, Portuguese, Filipinos and others, were recruited. The first Koreans to immigrate to Hawaii were mostly young (in their twenties), urban, single male workers, with a large percentage (close to 40%) being converts to Christianity. However, almost ten percent of these early immigrants were women. These women were called “picture brides” because they came to the U.S. as wives of Korean bachelors after an exchange of photographs. The average age difference between brides and grooms was 10~15 years. Many Korean bachelors had to work for over ten years to save enough money to finance marriages with women living in Korea. The “anti-miscegenation” laws prohibited marriage between whites and non-whites; therefore, Korean bachelors were unable to find brides in the United States. Korean women often worked as cooks, janitors, and launderers on the plantations where the workers lived. Approximately 800~1,000 Korean picture brides arrived in Hawaii to begin married life in the foreign country.

Independence Movement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church are two distinct characteristics of the early Korean immigrant community, both in Hawaii and on the mainland. Korean immigrant churches not only provided spiritual salvation, but more importantly a place to discuss and strategize the independence of Korea. The churches served the important function of regularly bringing together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which was spread apart in mostly rural areas, and organizing support for Korean independence. They were centers for educational forums and debates about Korea’s future.

Three Korean immigrant leaders in particular summarize the different strategies that people adopted to fight the Japanese while in the U.S. Park Yong-man advocated direct military confrontation, Rhee Syngman focused on diplomacy, and Ahn Chang-ho emphasized education and developing patriotic leadership. The March 1st Mansei Movement of 1919 was a pivotal historical event that ignited independence activism all over the world, including in the United States. Koreans throughout the country demanded “self-determination” and independence from Japanese rule through mass uprisings. Between March 1919 and December 1920, Korean Americans raise over $200,000 to support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Korea. One of the most significant examples of Korean immigrant ferocity against occupation of the homeland by Japan occurred in 1908 with the assassination of Durham Stevens. Stevens was labeled a traitor of Korean people, and Chnag In-whan shot and killed him. The early Korean American community focused much of its attention toward independence of the homeland while adjusting to immigrant life. Korean immigrants in this period had to confront and overcome racial discrimination in housing, public facilities, and the workforce. 
There are many prominent second generation Korean Americans who made significant and valuable contributions to American society as well as world peace. One of the most notable figures in Colonel Kim Young-oak. The life of Kim Young-oak can be painted in two broad strokes: a legendary war hero of both WWII and the Korean War and a pioneering humanitarian activist. Kim Young-oak is the only person who received the highest military honors from France, Italy, and Korea. In an ironic twist, the young U.S. Army Officer of Korean descent was assigned to an almost all Japanese-American Army unit. The now-famous 100th/442nd Regimental Combat Team fought in Europe during 1943~1945. Largely due to Kim Young-oak’s brilliant leadership in field operations and his undying dedication to his charges, this group of Japanese American soldiers quickly came to respect and trust its Korean-American leader. While Kim Young-oak had revealed his deep compassion for humanitarian causes early on through his orphanage work in the war-torn battleground of the Korean War, his real work as one of the most humane, effective and dedicated community leaders started after his retirement from the military in 1972.

The freshly retired Colonel Kim Young-oak disregarded multiple tempting offers from political and business fields. Instead, he was instrumental in starting am energetic wave of movements wit the purpose of sestablishing and guiding Asian American community organizations in newly settle immigrant neighborhoods. This task was undertaken at a time when immigrant community activism was stillborn. The range of his humanitarian activities is extensive and far-reaching across the spectrum. It includes: youth guidance and education, welfare of elders and women, family and healthcare-related agendas, and cultural, ethnic and artistic awareness programs.

Other notable second generation Korean Americans include: Sammy Lee, two time Olympic Gold medalist (1948and 1952); Mary Lee Shon, a well-known and respected educator in the Los Angeles Unified School District; David Hyun, an architect who designed and managed the “Japanese Village Plaza” in Little Tokyo, Los Angeles; Phillip Ahn, the eldest son of Ahn Chang-ho and renowned Asian American actor who has his name placed on the “Walk of Fame” on Hollywood Boulevard; and Alfred Song, who was the first Asian American elected official in the State of Califo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