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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공식 국가이다. 가사의 작사자는 미상이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안창호에 의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 1935년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한국환상곡》에 가사를 삽입해서 2012년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가사의 작사자는 안창호 설, 윤치호 설, 윤치호와 최병헌 합작설 등이 있다. 윤치호의 작사설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애국가를 바꾸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변호로 계속 애국가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의 정부 수립 이후 공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작사


윤치호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초에 쓰였으며, 작사자는 공식적으로는 미상이다. 작사자에 대한 설은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작사자 윤치호 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1907년에 써서 후에 그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08년에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에 수록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일제 시대의 애국가 출판물은 윤치호를 작사자로 돌리고 있는 등 윤치호 설에는 증거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尹致瑛)에 의하면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일부 작곡했다고 한다.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 목사는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윤치호가 지은 노래 중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안창호가 다시 고쳤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안창호)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안창호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


안익태

작곡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했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미국에서 출판된 것이 퍼져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졌지만 한반도에는 일제의 검열로 전해지지 못했다.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 을 매일 방송하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로 새 애국가의 악보가 전해졌다. 애국가의 악보는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면서 국가로 쓰게 되었다. 그당시 국민 마음속에 자리잡은 애국가의 위치를 고려하여 성문법으로 따로 규정하고 있지 않고,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져오고 있다.

애국가 사용 확정


백범 김구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였다.

기타

비판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초대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서울에서 받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음악제를 추진한 안익태를 상대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서 애국가의 가락이 도브리치 시의 시가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불가리아어: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도브루자 땅이여")와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일어날 것입니다!
(If Bulgarian singers came to Korea and sang O Dobrujanski Krai, Korean audiences would stand up!)

두 곡은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가 다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이고, 그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이듬해인 1936년이었기 때문에 그가 불가리아 민요를 접했을 가능성은 낮다.

1976년 이유선은 그의 책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다"고 썼다. 이에 안익태기념사업회 측은 반론자료와 함께 정부 각 부처에 진정서를 보냈다. 문화공보부와 국회사무처는 애국가가 30년동안 국가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발표했다.

애국가 곡에 대한 또다른 비판으로는 그 선율 자체가 처음에 못갖춘마디처럼 들린다는 것이 있다. 이로 인해 뒷부분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YB가 편곡한 애국가에서는 첫마디만 못갖춘마디로 바뀌어 있다.

1977년 한국음악협회의 회장 조상현은 애국가의 표절 의혹과 함께 가사와 선율의 불일치, 소극적인 내용의 가사 등의 이유를 들어 1월 26일 총회에서 새 국가를 만들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 다음 통과되면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발표했다. 하지만 총회에서 새 국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고 한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정부는 앞으로 국가를 새로 만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한 윤치호가 말년에 일본 제국의 관료로 일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 때 수감을 당한 적이 있는 근대 개화 사상을 전파한 지식인으로서 일제 초기에는 독립 운동가였지만, 105인 사건 후 전향하면서 30여년을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또한 작곡가인 안익태도 생전에 친일 활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저작권 논란

과거에는 애국가의 저작권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고 안익태의 유족이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1992년부터 이에 따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신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2003년에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는 프로축구단 경기에서 애국가를 무단으로 사용한 두 구단을 고소하였으며, 이에 따라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애국가의 저작권을 국가에서 사들이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며, 2005년 3월 16일 안익태의 유족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저작권을 기증하였다. 안익태 유족의 저작권 기증으로 논란은 종결되었다.

가사

한글漢字混用
1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1
東海 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2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
南山 위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서리 不變함은 우리 氣像일세.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3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
가을 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4
이 기상과 이 맘으로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
이 氣像과 이 맘으로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가사에서 '하느님'은 본래 윤치호가 작성한 가사와 안익태 작곡 원고에는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 바뀐 것이다. 상당수의 개신교인은 1절의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바꿔 부르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서울 숭실대학교 안익태기념관 건물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표기하고 있어 불교나 무신론자 등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스포츠와 애국가

야구, 농구, 축구 등 스포츠에서는 1절만 부르되, 홈 팀일 경우 먼저 부르고, 원정 팀일 경우 나중에 부른다.

Lyrics

 HangulHangul and hanjaRevised RomanizationEnglish translation
1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東海 물과 白頭山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Donghae mulgwa Baekdusani
mareugo daldorok
Haneunimi bouhasa
urinara manse
Until that day when
Mt. Baekdu's worn away
and the East Sea's waters run dry,
God (sky) protect and preserve our country!
Refrain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無窮花 三千里
華麗 江山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Mugunghwa samcheolli
hwaryeo gangsan
Daehan saram daehaneuro
giri bojeonhase
Roses of Sharon and Three thousand Li
of splendid rivers and mountains full;
Great Korean people, To the Great Korean way
stay always true!
2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南山 위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서리 不變함은
우리 氣像일세
Namsan wie jeo sonamu
cheolgabeul dureun deut
Baram seori bulbyeonhameun
uri gisangilse
As the pine atop
Namsan Peak stands firm,
unchanged through wind and frost,
as if wrapped in armour,
so shall our resilient spirit.
3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가을 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Gaeul haneul gonghwalhande
nopgo gureum eopsi
Balgeun dareun uri gaseum
ilpyeondansimilse
The Autumn skies are void and vast,
high and cloudless;
the bright moon is our heart,
undivided and true.
4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 氣像과 이 맘으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
나라 사랑하세
I gisanggwa i mameuro
chungseongeul dahayeo
Goerouna jeulgeouna
nara saranghase
With this spirit and this mind,
let us give all loyalty,
in suffering or in joy,
to the country's love.

It is believed that the lyrics were written for the cornerstone-laying ceremony of the Independence Gate in Seoul in 1896 by Yun Chiho, a politician, or by An Chang-ho, a pro-independence leader and educator. Initially, Aegukga was sung to the tune of the Scottish folk song "Auld Lang Syne", introduced to Korea by Western missionaries.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1945) in Shanghai, China, adopted it as their national anthem. At a ceremony celebrating the founding of South Korea on 15 August 1948, the Scottish tune was finally replaced by the Finale of Korea Fantasia that Ahn Eak-tai had composed in 1935. The new "Aegukga" was later adopted by the Presidential Decree of 1948 by then-President Syngman Rhee (or Lee Seungman).

Copyright issues

Since the composer Ahn Eak-tai died in 1965, the copyright for the music will not expire at least until 2015. Two Korean professional soccerteams were sued by a copyrightholders' group for public playing of this song in December 2003. The composer's widow Lolita Ahn and her family then relinquished all rights to Aegukga to the Korean government on 16 March 2005. The lyrics, written in the 19th century, are in the public domain.

Aegukga and the Olympics

It was a sunny August afternoon in Berlin.  The opening ceremonies of the 1936 Summer Olympics had just concluded.  Several Korean athletes representing the Japanese flag were gathered at a corner of the stadium.  These athletes, including Sohn Ki Jung, were lamenting the loss of their country.  At that moment, a lone Korean approached them, offering to sing a song of encouragement that he had composed. With all of his enthusiasm, he started singing.

“Until that day when Mt. Baekdu's worn away and the East Sea's waters run dry,God (sky) protect and preserve our country!” 

The title of this song? “Dae-Han Aegukga (Song of Patriotism of Korea)."

Fifteen days later, Sohn Ki Jung crossed the finish line of the Marathon as the victor. Form a distant corner of the stadium, a song could be heard.  There were maybe three, perhaps four, Koreans in the stand, singing loudly the same song that Sohn had heard two weeks back.  Leading them was the same lone Korean who first sang to these athletes two weeks ago so enthusiastically.  His name was Ahn Ik Tae.

Two months prior, he had finished composing the melody to the song when he heard that there would be Korean athletes participating in the upcoming Olympic games.  Having heard the news, he quickly changed the title from Aegukga to the Cheering Song and made plans to cheer on the Korean athletes with his new song.

Five years ago, at a small church in Los Angeles, Ahn had heard the parishoners sing the Aegukga.  At the time, the song was se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The sadness that Ahn felt, hearing what was his country’s anthem set to a song from a different country, must have been too much for him to bear.  Driven by that incident, he would spend the next five years composing the now familiar melody, collecting over 40 different songs from countries around the world.  And, as Aegukga flowed from that distant corner, Ahn’s sense of accomplishment must have been immeasurable. 

The song that was born from the Olympics moves Koreans profoundly even to this day. 


올림픽과 애국가

1936년 8월 초하룻날 베를린 올림픽의 개막식이 끝나자 당시 일본 대표선수로 참가했던 한국선수 손기정(孫基禎), 남승룡(南昇龍), 김용식(金容植), 이규환(李圭煥), 장이진(張利鎭) 등이 스탠드 한쪽 잔디밭에 모여앉아 나라 없는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재독(在獨) 한국인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 사람이 강한 평안도 사투리로 자기가 손수 지은 응원가를 불러주겠다면서 종이쪽지를 꺼내더니 손, 발, 목으로 장단을 맞추어가며 그 응원가를 불러대는 것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독일 교포가 들고 부른 종지쪽지 겉에는 《대한애국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보름 후에 손기정 선수가 당당히 마라톤에서 제1위로 테이프를 끊자, 아우성을 치며 이를 응원하던 스탠드 한쪽 구석에서 돌연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겨우 서너 명의 교포들이었다. 그 하찮은 합창대 앞에 서서 맨손으로 미치광이처럼 지휘를 하고 있는 분은 바로 보름 전에 응원가를 손수 지어 갖고 와서 신나게 노래를 불러주던 바로 그 재독교포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안익태(安益泰)였던 것이다. 그는 두 달 전인 1936년 6월 초순쯤 애국가의 끝장의 작곡을 완성했는데, 마침 베를린 올림픽에 우리 한국선수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애국가를 응원가로 임시 이름을 바꾸어 올림픽 대회장에 선보였던 것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짓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5년 전 로스앤지젤레스에서 한국인 교회에들렀을 때 일이었다.

그곳 교포들이 올드랭사인의 스코틀랜드 민요 곡조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망국(亡國)의 애국가라 하지만 남의 나라 곡조, 더구나 이별가의 슬픈 곡조로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슬픔을 이겨내고 앞을 내다보는 그런 애국가의 악상(樂想)을 얻기 위해 그는 세계 40여개 국의 국가를 수집, 5년 만에 작곡이 완성됐고, 애국가가 처음 공개된 것이 바로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이었던 것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짓기로 마음먹었다던 바로 그 로스앤젤레스, 그 올림픽 경기장에 잇따라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감회를 더 깊게 해준다. 올림픽에 울려퍼진 애국가, 그 애국가가 이토록 우리들에게 감동적인 것은 애국가가 올림픽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규태 코너 《배꼽의 한국학》중에서

Read the Wikipedia Article about Aegukga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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