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 Aegukga

  1. At the Berlin Olympics

Aegukga and the Olympics

It was a sunny August afternoon in Berlin.  The opening ceremonies of the 1936 Summer Olympics had just concluded.  Several Korean athletes representing the Japanese flag were gathered at a corner of the stadium.  These athletes, including Sohn Ki Jung, were lamenting the loss of their country.  At that moment, a lone Korean approached them, offering to sing a song of encouragement that he had composed. With all of his enthusiasm, he started singing.

“Until that day when Mt. Baekdu's worn away and the East Sea's waters run dry,God (sky) protect and preserve our country!” 

The title of this song? “Dae-Han Aegukga (Song of Patriotism of Korea)."

Fifteen days later, Sohn Ki Jung crossed the finish line of the Marathon as the victor. Form a distant corner of the stadium, a song could be heard.  There were maybe three, perhaps four, Koreans in the stand, singing loudly the same song that Sohn had heard two weeks back.  Leading them was the same lone Korean who first sang to these athletes two weeks ago so enthusiastically.  His name was Ahn Ik Tae.

Two months prior, he had finished composing the melody to the song when he heard that there would be Korean athletes participating in the upcoming Olympic games.  Having heard the news, he quickly changed the title from Aegukga to the Cheering Song and made plans to cheer on the Korean athletes with his new song.

Five years ago, at a small church in Los Angeles, Ahn had heard the parishoners sing the Aegukga.  At the time, the song was se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The sadness that Ahn felt, hearing what was his country’s anthem set to a song from a different country, must have been too much for him to bear.  Driven by that incident, he would spend the next five years composing the now familiar melody, collecting over 40 different songs from countries around the world.  And, as Aegukga flowed from that distant corner, Ahn’s sense of accomplishment must have been immeasurable. 

The song that was born from the Olympics moves Koreans profoundly even to this day. 


올림픽과 애국가

1936년 8월 초하룻날 베를린 올림픽의 개막식이 끝나자 당시 일본 대표선수로 참가했던 한국선수 손기정(孫基禎), 남승룡(南昇龍), 김용식(金容植), 이규환(李圭煥), 장이진(張利鎭) 등이 스탠드 한쪽 잔디밭에 모여앉아 나라 없는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재독(在獨) 한국인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 사람이 강한 평안도 사투리로 자기가 손수 지은 응원가를 불러주겠다면서 종이쪽지를 꺼내더니 손, 발, 목으로 장단을 맞추어가며 그 응원가를 불러대는 것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독일 교포가 들고 부른 종지쪽지 겉에는 《대한애국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보름 후에 손기정 선수가 당당히 마라톤에서 제1위로 테이프를 끊자, 아우성을 치며 이를 응원하던 스탠드 한쪽 구석에서 돌연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겨우 서너 명의 교포들이었다. 그 하찮은 합창대 앞에 서서 맨손으로 미치광이처럼 지휘를 하고 있는 분은 바로 보름 전에 응원가를 손수 지어 갖고 와서 신나게 노래를 불러주던 바로 그 재독교포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안익태(安益泰)였던 것이다. 그는 두 달 전인 1936년 6월 초순쯤 애국가의 끝장의 작곡을 완성했는데, 마침 베를린 올림픽에 우리 한국선수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애국가를 응원가로 임시 이름을 바꾸어 올림픽 대회장에 선보였던 것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짓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5년 전 로스앤지젤레스에서 한국인 교회에들렀을 때 일이었다.

그곳 교포들이 올드랭사인의 스코틀랜드 민요 곡조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망국(亡國)의 애국가라 하지만 남의 나라 곡조, 더구나 이별가의 슬픈 곡조로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슬픔을 이겨내고 앞을 내다보는 그런 애국가의 악상(樂想)을 얻기 위해 그는 세계 40여개 국의 국가를 수집, 5년 만에 작곡이 완성됐고, 애국가가 처음 공개된 것이 바로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이었던 것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짓기로 마음먹었다던 바로 그 로스앤젤레스, 그 올림픽 경기장에 잇따라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감회를 더 깊게 해준다. 올림픽에 울려퍼진 애국가, 그 애국가가 이토록 우리들에게 감동적인 것은 애국가가 올림픽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규태 코너 《배꼽의 한국학》중에서